저는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 따라 항상 기도하는 소녀, 받은바 재능으로 항상 하나님을 기뻐 섬기는 소녀 등으로 불리며 부모님과 집사님들의 칭찬 속에 성장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는지 방언과 신유의 은사와 영적인 리더십까지 주셔서 저의 교회 활동은 언제나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만약 제가 목회를 하면 당연히, 그것도 아주 잘 할 줄 알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며 교회를 개척한 지 만 1년이 지나자 교인수가 100명이 넘었습니다. 제가 받은 은사들을 교인들과 경험하며 열심을 다해 기도와 심방으로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분주히 오가던 나날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열심을 인정하시고 더 많은 축복을 부어주시리라는 확신과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어느 날 문득 저는 제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행복하기는커녕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충격은 저와 남편과의 목회 방향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함으로 이끌고자 했던 남편의 사역 방향과 무엇보다도 은사 중심을 앞세우던 저는 갈등할 수밖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2020년 7월에 전입해 지금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군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15보병사단은 대한민국 중부전선의 전방을 담당하며 제가 사역하고 있는 여단은 최전방 지역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용진교회와 임마누엘동도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제게 맡겨진 장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찾아가 따뜻한 격려와 기도를 하며 성실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군 선교활동 중 “전방부대 군종활동”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교회사역 매주 제가 담임하고 있는 2개교회와 소초교회에서 기독 장병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단본부뿐만 아니라 산정산에 있는 부대와 최전방에 있는 부대까지 찾아가는 예배를 통해 군 장병들과 함께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곳곳에 예배를 사모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거리가 멀어 교회로 나오지 못하는 장병들을 위해 제가 직접 소초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마저도
2016년 1월 20일, 그 해 겨울 중 시리고도 추웠던 그 날,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남편 박정재 목사를 주님께 먼저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눈물도 나지 않던 장례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경험해야 했던 어려움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집에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어린 자녀들과 함께 식당으로 나섰던 그 날의 감정과 그 날의 밤거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운전대를 잡았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고 누군가에게 컨펌을 받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늘 남편의 의견을 묻고 그의 결정에 맞췄던 나는 밥 먹을 식당 하나 결정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남편 없는 삶을 시작하는 나에게 닥쳤던 첫 번째 어려움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어린 자녀들과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염려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부터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그렇게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 교회 성도님들과 알지 못하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먹이시고 입혀 주셨다. 어찌나 그 사랑이 크던지 ‘하나님! 도대체 저에게 왜 이렇게 까지 해 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넘치도록 큰 사랑을 부어 주셨다. 특별히 ‘요
필자가 초임 군목으로 부임했을 당시가 기억난다. 기억하기에는 근무하는 부대의 지휘관께서 1984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군인 신분으로 수상 인터뷰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라는 말을 하는데 성직자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 화두를 가지고 군인교회 사역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느끼는 또 하나의 화두는 군인교회란 무엇인가였다. 1980년대만 해도 민간교회와 군대교회를 구분해 ‘군대교회도 교회인가?’라는 약간의 비하가 섞인 듯이 바라봤고 또 열등한 교회인 것처럼 느끼는 분위기가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고위 지휘관이나 군인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유야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만큼 군대 내에서 교회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장벽 밖에서 장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써 통제와 규율의 익숙하지 않은 군 문화에 적응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겪는 위기는 신앙적 위안을 찾는 좋은 기회가 된다. 특별히 신병훈련 과정에서 점점 미래의 불안, 사회적 격리, 수용 받지 못한 존
요한복음 10장 3절에서 주님은 “문지기가 양을 위해 문을 열고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를 가리켜 ‘문지기’(Gate Keeper)라고 하신 게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문지기는 말 그대로 문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목자들이 자기 양떼가 들어있는 문을 제대로 잘 지켰어요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방황을 하는 양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문지기 노릇을 바르게 못한 결과라는 것을 솔직히 부끄럽지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지기가 왜 필요하냐면, 양을 노리고 다가오는 늑대와 이리 떼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마7:15) 주님 당시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적 이리 떼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목자된 우리가 문지기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희생 당한 양 떼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늑대나 이리는 혼자 다니지 않습니다. 꼭 떼로 몰려 다닙니다. 영적인 이리 떼도 동일한 특성이 있습니다. 갈수록 다양한 이리 떼가 어리고 순진한 양들을 공격하고 노략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문지기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권 확립 작업을 끝낸 다윗은 수도에 법궤를 모셔야겠다고 결심한다. 시온을 그저 자신이 통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배받으시는 곳으로 삼고 싶었다.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중대한 사명이자 거룩한 임무로 여겼다. 그만큼 예배를 기뻐한 것이다. 사고로 운반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다시 추진해 결국 법궤를 모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법궤가 도착했을 때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14). 그는 춤꾼이 아니다. 평생 춤을 춘 기록이 여기밖에 없다. 골리앗을 죽였을 때도, 왕이 되었을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도 춤을 추지는 않았다. 그런 다윗이 춤을 춘 것, 그는 온 몸으로 예배한 춤추는 예배자였다. 법궤 방치? 다윗성으로 모셔라 사무엘상 7장 이래 실종된 법궤, 사울 왕 통치 기간에 법궤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의 상징인데 사울 왕은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루살렘 서쪽 11km쯤 떨어진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사울은 30년 이상 법궤를 방치했다. 그만큼 예배에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다윗은 법궤를 국가의 최고 보물로 여긴다. 그래서 법궤 모셔오는 것을 하나님 모셔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길이가 2규
겨우내 순금 집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새벽기도회에 나왔는데 혹시나 ‘치매증상이 더 심해지신 건 아닐까?’ ‘하루 종일 다니시던데 어디서 삐끗하신 건 아닐까?’ ‘고부간에 늘 아슬아슬, 티격태격 하시더니 막내딸 집으로 가신 건 아닐까?’ 그렇게 보이시지 않던 집사님이 겨울이 한참 지난 5월이 되어서야 대문 앞에 멍하니 서 계신 모습을 뵐 수 있었다. “집사님 그동안 너무 궁금했어요. 어디 갔다 오셨나요?” “예!” 짧게 대답만 하시고는 무표정하게 서 계시는 것이었다. 아니 영 딴 사람 보듯 집사님이 저를 완전히 몰라보고 계셨다. 열댓 살부터 마음 속에 쌓은 한을 그렇게 눈물 콧물 범벅으로 풀풀 풀어내시더니 이젠 전부 다 풀어내신 건지 모르겠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저보다 훨씬 총기가 좋으시던 분이 갑자기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는 바라기가 되셨던 것이다. ‘주님! 순금 집사님 꽃 피는 봄에 가길 소망하셨는데, 그것이 집사님 소원이셨는데 주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하긴 주님 생각은 우리 생각과 영 다르시지요? 그런데요, 그 집사님 소원은 꽃 피는 봄날이었어요.’ 한 달 여 지나 6월 어느 날, 부서져라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김형윤 목사 순회선교사 동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곳에서 목장의 주인이 되어 양을 쳤던 필립 켈러(Phillip Keller)는 그의 목양 경험을 바탕으로 목자의 시로 유명한 시편 23편을 묵상하는 책을 저술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는 본서에서 양들에게 독특한 습성이 있다고 했는데, 시편 23편 2절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를 설명하면서 양은 본래의 생리상 네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한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첫째, 양들은 겁이 많은 동물이어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눕지 않고 둘째, 집단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싸우면 눕지 않으며 셋째, 파리나 기생충 등 벌레 때문에 아프거나 괴로울 때도 자리에 눕지 않고 넷째, 배부르게 꼴을 먹지 않으면 절대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들을 편히 눕게 하려면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줘야 하는 데, 그게 목자의 사명입니다. 양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긴장감과 괴로움과 배고픔에서 벗어난 자유와 만족감입니다. 양들을 모든 염려와 두려움에서 놓임을 받게 해 줄 수 있는 이는
나영재 목사 침례교 군종목사단 700특공연대 반석교회 최근 한국교회에 젊은 청년세대들의 감소추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미래 교회성장에큰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 복무기간을 거치게 되는데, 군에 입대하게 되면 불안한 마음에 신앙심을 갖게 되므로 군대를 복음전파의 황금어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군의 특성을 청년 전도와 한국교회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 한국 군종목사단과 한국기독교 군선교연합회가 군선교비전 2030실천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비전 2030은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100만 장병을 한국교회로!’라는 목표로, 이미 침례를 받고 입대한 4만여 명에 더해, 육⋅해⋅공군⋅해병대를 합친 6만여 명의 신규 침례자를 포함해서 매년 10만 여명을 10년 동안 양육해서 한국교회로 파송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실시됐던 비전2020운동에 이은 새로운 군선교 정책의 방향으로, 기존의 전도, 침례, 양육, 파송이라는 기본 틀은 유지하되, 지속적으로 변화해 가는 선교환경과 시대적 상황에 맞춰 전략적으로 군 교회에서 장병들을 양육하여 한국교회로 파송한다는 새로운 군선교의 비전이다. 비전2
차성회 목사 샘밭교회 2020년 1월은 교회에 활기가 가득했었다. 작은 농촌교회 공동체이기에 닭갈비 사업을 하는 형제의 사업장 터를 구입하고 옮기는 일이라든지, 직장을 구하는 청년을 위해 온 교우들이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며, 모이면 시끌벅적 수다도 있고 반가움이 가득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질 때 도움을 받았으니, 우리도 복음의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해외 한 교회를 정해 형제교회라 부르며 도왔다. 완공된 형제교회를 성도들이 함께 방문하는 단기선교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출국을 얼마 앞둔 우리를 멈추게 했다. 한차례 지나가는 소나기려니 했으나 하나 하나 중단해야만 했다. 마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했던 목욕을 위한 차량 봉사도 중단하고, 대심방도 취소하고, 2월 셋째 주부터는 주일 낮 예배만 시간차를 두고 모이고 나머지 모임은 정지했다. 농촌교회 공동체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이 비교적 많다. 교회가 삶의 중심이기도 하고 목회자와의 관계 영역도 더 많다. 바이러스 분야에는 비전문가였지만 뉴스와 데이터를 부지런히 찾아보며 할 수 있는 대응 방법을 제시해야 했다. 농촌에 위치하고 있어 확진자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자에 거리두기
◎ 횡단보도 활성화시 우회전 금지 올해 1월부터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시 보행자 신호를 무시하면 과태료와 자동차 보험료가 할증된다. ◎ 최저시급 인상 올해 최저시급은 9160원이다. 2021년 최저시급 8720원에 비해 5.1% 오른 금액이다. 최저시급을 월급으로 환산 시 월 노동시간 209시간 기준 2022년 최저 월급은 191만 4440원이다. ◎ 저소득 지역가입자 연금보험료 지원 저소득 지역가입자에 7월부터 연금보험료의 50%를 지원할 예정이다. ◎ 국가장학금 지원 확대 기초·차상위 가구의 첫째 자녀에 대한 지원 금액은 연간 520만 원에서 700만 원으로 확대되 고, 둘째 자녀에게는 등록금 전액이 지원된다. 또한 자금지원구간 5·6구간은 연 368만 원에서 연 390만 원으로, 7구간은 연 120만 원에서 연 350만 원으로, 8구간은 연 67.5만원에서 연 350만 원으로 그 지원 금액이 확대된다. ◎ 근로장려금 소득 상한금액 인상 ▷단독가구는 현행 2000만 원에서 2200만 원 ▷홑벌이가구는 3000만 원에서 3200만 원 ▷맞벌이가구는 3600만 원에서 3800만 원으로 인상 된다. ◎ 연소득 2000만 원 넘는 피부양자, 건강보험료 부
이석곤 목사 침례교 군목단장 우리나라의 군종제도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군종제도가 도입한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은 종군의 필요성 대두와 더불어 유엔군사령부에 소속된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William E. Shaw, 서위렴)와 장로교 헤럴드 보켈(Harold Voekel) 목사같은 외국 선교사의 노력과 더불어 1950년 9월 18일 기독교의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단과 천주교가 군종제도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해 1950년 12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실 지시 제29호에 따라 군종제도를 설치하게 됐고, 1951년 2월 7일 육본 일반명령 제31호에 의거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가 설치됨으로써 군종제도가 시작됐다. 그리고 1951년 2월 28일 제1기 군종후보생으로 28명의 목사와 11명의 신부가 입대해 4주간의 훈련 후에 무보수촉탁 문관으로 임관하여 4월에 부대에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어느덧 70년의 역사를 이어오게 됐다. 우리나라의 군선교는 이러한 군종제도와 그 시작을 같이한다. 물론 군종제도가 설립되기 이전에도 1948년 11월부터 기독교 신자 간부들은 이규갑 목사가 담
여주봉 목사 포도나무교회 나는 호세아 4:6을 토대로 몇 가지를 나누고 있다. 가장 주된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과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특히 우리의 다음 세대를 잃어버린 원인을 보기 위함이다. “…나도 네 자녀 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오늘날 한국교회 반 이상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따로 없다는 이야기가 제기된 지 오래됐다. 심지어 2030년까지 80%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이야기까지 들린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인과 역사가 없이는, 주일학교가 더욱 줄어드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청년부의 축소로, 그것은 다시 주일학교의 축소로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현재 심하게 고령화되어 있는 한국교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될 것인가는 생각 하기조차 싫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계신다고 확신한다. 앞으로 그런 부분들을 하나하나 나누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 가장 근본적인 해답은 영적인 면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 중직자 들부터 모두가 하나님께로
독서 모임에 들어갔다가 정치범으로 사형 장까지 가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참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었다. 처형당하기 직전 황제의 감형 조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시베리아 유형, 수용소에 4년을 갇혀 지냈다. 그런데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또 출소 후의 건강을 위해 노동에도 정을 붙이려 노력했고, 장차 쓸 소설 소재를 위해 범죄자 관찰도 열심히 했다. 결국 나중에 유형 생활 수기인 장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외에도 4대 명작,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범죄소설을 쓴 범죄 문학의 마법사가 된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것이다. 30대 대부분을 시베리아에서 보낸 도스토엡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도 삶이 고달팠다. 형과 함께 잡지 사업하다 빚만 잔뜩 지고 형이 죽자 그의 빚까지 다 떠맡아 평생을 빚에 시달렸고, 폐결핵으로 7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만났던 아내를 잃고, 자신도 간질, 폐기종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그러나 매 순간이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면서도 ‘생을 선물’이라 여기며 지치기는 커녕 열심히 작품을 써서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다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는 얼마나 아팠으면 ‘너도 아프니?’라는 시에서 날아온 새나 꽃과 나무에게도 ‘너도 아프니?’라고 물었다고 했고, ‘환자의 편지’라는 시에서는 아플수록 침묵했다고, 남몰래 울기도 하고 괴로워 잠도 못 잤다고 했다. 또 ‘암세포에 대한 푸념’이란 제목의 시에서는 “약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대요”라는 첫 문장으로 시를 썼다. ‘마지막 편지’라는 시를 읽을 땐 이젠 정말 마지막인가 싶었지만 고맙게도 75세인 이해인 수녀가 우정을 주제로 한 글을 모은 ‘친구에게’라는 에세이를 2020년 7월에 출간했었다. 인생의 마무리를 너무 멋지게 잘하는 분인 것 같다. 반면에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의 마지막은 너무 외롭고 추하다. 사무엘상 후반부가 다윗 중심이었는데 본문은 초점이 사울에게 맞춰진다. 마지막이 임박한 때, 죽기 직전의 사울,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무당 이야기, 그것도 무녀는 긍정적이고 사무엘은 오히려 좀 부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분위기다.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명예와 특권을 누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질투심 때문에 무너지면서 갈 데까지 간 사울, 선을 넘었지만 마지막이라도 아름다운 퇴장이면 좋겠지만 마지막이 너무 두렵다. 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