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은 예수님께서 이미 누가복음 21장 11절에 종말 때 일어날 징조 중의 하나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저의 생애에도 이런 전염병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니 전세계의 인구가 긴장해야 하며, 심지어는 태어나는 아이들까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삶을 보면 보통 안쓰럽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발병했을 때 정부 시책으로 처음에는 교회를 향하여 예배 금지 명령이 내려졌고, 그 후엔 비대면 예배를 지시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실태입니다. 이로 인해 교계에서는 크게 두 갈래 양상으로 나뉘는 것을 보게 됐는데, 하나는 정부 시책에 순응해 비대면 예배로 드리는 노선과 또 다른 하나는 평상시처럼 대면 예배를 고수하는 노선입니다. 목회자들은 물론 성도들조차도 혼선을 빚으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작년에 대통령이 교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예배 방식을 일괄적으로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해 달라고 부탁한 자리에서 한교총 대표 목사님은 대통령 면전에서 “종교 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 후 정부에서는 대면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회자되는 유머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속으로 “아니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하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누군지 보고 싶었지만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께서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 어요?”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듯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같이 가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 가지고?”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잘 들어보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하루 종일 돌아 다녀 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잠시 착각하고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마을에서 공부하시는 문해학교 학생
미국에서 1년 동안 가족과 함께 지내다 귀국한 딸에게 물어본 게 있다.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땠어? 힘든 부분이 많았 겠지?” 그런데 딸은 “아니예요, 거기서 제일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요. 부담이 없었고, 눌렸던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지내니 아주 좋았어요”라고 매우 충격적인 대답을 해줬다. 이 일로 그동안 딸이 목회자 자녀로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상가 건물 한 층을 임대해 예배 실과 사택으로 사용하다보니 자녀들은 어린 시절을 좁은 공간에 갇혀서 답답하고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내가 전도 활동을 하기 위해서 외출한 후엔 가끔 정신 이상자나 걸인이 찾아오면 문을 잠그고 불안감에 떨며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 자녀들이 받기 쉬운 스트레스나 고충도 겪었으리라. 지미 도드와 래리 맥누선 공저인 “목회자도 사람이다”란 책에는 이런 고충들을 진솔하게 써놓았다. 곧, 목회자는 교인들을 상사와 같이 섬기는데, 그상사들은 목회자 자녀들까지 감시와 단속을 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어려도 예의 바르며 친절하기를 원한다. 믿음 좋은 모범적인 자녀들로
구약시대라면 십계명의 지위와 권위는 당당했을 것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지금은 신약시대다. 신약시대의 십계명의 지위와 권위는 어떤 것인가? 초단부터 말하지만, 십계명은 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설 제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는 십계명이 관여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벌써 이런 표현에 알레르기식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내 눈앞에 훤하게 많이 보인다. 우선 십계명의 역사적 과정을 요약한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의 중간모음이 십계명이고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산상수훈으로 자리를 펴다가 끝내 두 계명으로 응결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묻노니 어느 누구인들 최후의 요약적인 두 계명을 100% 지킬 자가 있느냐? 아무도 없다. 그러니깐 모두가 죄인이다. 이를 예수 해결해 주셨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사무엘상 17장은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다. 58절이나 되는데 골리앗이라는 이름은 4절과 23절에 한 번씩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이름이 너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골리앗’ 하면 거인이나 장애물의 화신이 됐다. 반면에 다윗은 어린 소년,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다. 승리의 비결이 뭘까? 골리앗, 어마어마한 거인이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4절), 한 규빗이 사람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니까 대체로 45~50cm, 그렇다면 거의 3m 정도의 거인이다. 기네스북 역대 공식 최장신 로버트 워들로우(Robert Wadlow)의 272cm보다 한참 더 큰 비공인 역대 세계 최장 신이다. 키만 큰 게 아니라 힘도 셌다. 갑옷의 무게가 놋 5천 세겔, 1세겔이 11.4g이니까 57kg이고, 창날 무게만철 6백 세겔, 거의 7kg에 가까우니 맞짱 뜨다가는 뼈도 못 추릴 정도다 (5~7절). 그런데 고대 전투는 1:1 싸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윗은 골리앗과 맞짱을 뜬다. 블레셋과 이스라엘간에
내가 시내 전철을 탄 시간은 여름 오후 4시경인가 싶다. 동대문역사 문화역에서 한 여인이 건너편 경로석에 와 앉았다. 오후라서 그녀와 나사이에는 가리울 승객도 없는지라 그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나와 그녀는 생명부지간이다. 그런데 오늘 오후 나는 전철 여행 중에 값내지 않고 중년 미녀를 바라 는 기쁨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 속의 보너스로 생각한다. 에이 목사치고는 좀 지나친 감정표현이 아닌가라고 옆구리를 슬쩍 찌를 다른 동역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앞의 중년 미녀는 60세 후반인듯 한 여인이었다. 아래는 검은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하얀 블라우스 옷을 걸쳤는데 의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키는 어림잡아도 확실히 나의 163cm보다는 더 올라간 신장이었다. 샌들을 신은 그녀의 열발가락은 투명체로 손질되어 있었 다. 뭉실뭉실하게 부풀어있는 머리 카락 모습이 마치 구름 같았으나 단지 검은색 구름이었다. 눈은 맑은 호수처럼 시원하고 입술은 통통한 앵두 같고 코는 클레오파트라의 그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가끔 눈을 감았 다떴다 하는 모습이 더 매력적이었다. 얼굴색은 거의 백인같이 흰색인데 양볼엔 약간의 홍조가 띄었다. 가벼운 핸드
숀 코넬리 주연의 ‘왕이 되려 한 남자’(The Man Who Would King)라는 영화가 있었다. 007의 사나이, 숀 코넬리는 가장 제임스 본드다운 제1대 제임스 본드다. 그 영화가 나온 지 3년만인 1978년에 타임지(Time)가 영국 찰스(Charles Windsor) 황태자를 표지 모델로 선택하면서 제목을 ‘왕이 될 남자’(The Man Who Will Be King)라고 붙였다. 하지만 43년이 지났는데도 찰스 황태자는 아직도 왕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왕이 될 남자로 남아 있다. 그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올해 만 94세이고, 본인도 나이가 만 71세나 됐으니 정말 왕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본문 사무엘상 16장에도 ‘왕이 될 남자’가 등장한다. 다윗이다. 다윗도 왕이 되는 과정이 쉽지 않다. 왕은커녕 오히려 죽을 것 같은 위기들이 도사리고 있다. 15세에 기름 부음 받지만 왕이 된 것은 30세, 긴 세월 동안 ‘왕이 될남자’로 힘겹게 지낸다. 그러나 결국은 왕이 될 남자다.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히든카드로 등장하면서 다윗 시대가 시작된다. 왕이 될 남자 다윗, 이제부터는 사무엘서의 역사는 다윗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자주 외국에 체류하는 나와 아내는 양식에 약간은 익숙하지만 솔직하게 한국 마트에 가서 양식 식자료를 선뜻 사오지 못하는 것에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미안한 바도 느낀다. 오늘 TV에 햄이야기가 나오기에 나와 아내는 마트에 가서 햄을 사가 지고 와서 먹기로 하고 내가 심부름을 했다. 이렇게 해서 사온 햄의 껍질은 육안으로 보아서는 명백히 비닐 껍질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비닐 껍질은 벗겨내고 먹는 것이라 여겨 두 내외는 이놈의 껍질을 벗기는데 여간 공이 들지 않았다. 우선 잘 벗겨지지를 않는데다가 온 손에 기름이 묻고 작업 결과도 그 매끄럽던 햄이 전쟁터에서 총알을 맞은 듯 만신창이가 됐다. 그 매끄럽고 반들반들하던 햄이 몰골이 흉하기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고통의 작업을 하는 것이 정상인가. 외국에서 먹어보던 햄을 생각해 보았다. 또 한국 호텔에서 먹어보던 햄을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그것들은 우리가 집에서 먹던 햄과는 모습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 껍질 까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먹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아내는 그럴 것 같기도 하단다. 그래서 오늘 아침엔 오븐에서 갓 꺼내온 햄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어보았다. 이상하더군. 그래도 나와 아내는
뉴요커들에게 사랑받는 뉴욕 맨하탄 중심의 센트럴파크는 무려 100만 평이 넘는 공원이다. 사람들은 이 금싸라기 땅에 고층건물을 올리면 부가가치가 엄청날 텐데 왜 이렇게 크게 만드냐고 했지만 도시설계사 로버트 모지스 (Robert Moses)는 “이 엄청난 도시에 이만한 공원이 없다면 훗날 이 공원보다 훨씬 더 큰 정신병동을 지어야 할것”이라고 했단다.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다.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왕이 된 사울은 듣는 귀가 막히고, 보는 눈이 희미해지고, 깨닫는 능력이 줄어들면서 교만해진다. 말씀을 무시하고 오버하며 남 탓하다가 결국 하나님 눈 밖에 난다. 사무엘상 15장도 하나님 눈 밖에 난 이야기인데 그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했던 말이 “제사보다 순종”이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가서 아말렉을 진멸하라’(3절),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진멸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렘’(herem), 마치 번제처럼 다 태워라, 소멸하라는 것이다. 좀 잔인하고 충격적이지만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유아, 그리고 그 소유물까지 다 제거하라고 했다. 이유는 출애굽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행한 악 때문이다(2). 아말렉은 유다 남
돈이 하도 많아서 돈 걱정 안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무료할까. 자나 깨나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영 재미없어서 못 살겠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꽤나 많이 있다. 그런 상태가 심하면 돈덩이 위에서 생을 결단내는 자도 있다. 우유 먹기가 힘들었던 한국 1970년도에 유행어가 생겼다. 우유 배달원은 강하고 앉아서 우유 받아먹는 자는 약골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서 똑똑히 본 광경이 있다. 부잣집 맏아드님은 공자처럼 농일없이 그늘나무 밑에서 논어, 맹자 글을 읽는데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갓 나온 아침 잠자리 같았다. 그의 아범은 자식 강하라고 씨암탉 잡아 보양해 주지만 아들의 약골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 집에 일꾼으로 들어온 머슴은 권투선수처럼 골육이 강했 다. 머슴에게 보양식을 안길 턱은 없고 주인이 주는데로 물론 식사는 건너지 않고 착실히 먹었는데 결과는 딱하게도 그 집 아드님은 조사(早 死)하고 머슴은 소 몰고 들로 가더라는 장면. 나는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보았다. 아주 돈은 많은데 자기가 쓰기에도 지루하고 또 딱히 어디에 어떻게 쓸 줄도 모르는 부자의 따분함을 택하랴. 혹은 돈이라면 언제나 호주머니가 배고파
침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는 친족 관계였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했었다. 침례요한과 예수는 육신적으로 가까운 친족으로 모친들의 뱃속에 인사하고 즐겨 뛰노셨다(눅 1장). 마침대 6개월 먼저 출생한 침례요한은 예수를 위로 모시고 자기를 낮추는 임무의 온전한 수행자였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1:7) “요한이 그에 대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5~18). 요한은 예수 증거하러 세상에 보냄을 받아왔다.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예수에게로 돌리고 폭탄선언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그런데 침례 요한의 초라한(?) 죽음을 보라. 요한은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바람 부는 겨울에도/ 따뜻하게 웃어주고/ 내 마음 쓸쓸한 날은/ 어느새 곁에 와서/ 기쁨의 불을 켜주는 꽃, 반세기를 동고동락한/ 동백꽃을 바라보 며/ 나도 이젠/ 한 송이 동백꽃이 되어/ 행복하다” 1976년에 ‘민들레 영토’를 첫 시집으로 엮었던 이해인 수녀는 38년 후인 2014년 나이 70에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녀는책 서문에서 “겨울 추위 타지 않고 밝고 환하게 꽃으로 웃어 줄 줄 아는 동백,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열매를 잘 익혀 멋진 기름을 짜게도 하기에 그 일생이 참 아름답다”며 “필 때도 질 때도 아름답고 고운 동백꽃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사무엘서를 읽으며 사무엘도 ‘동백꽃을 닮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상 12장에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말을 세 번 쓰고 있다(8:1, 5, 12:2). 마치 등장하자마자 늙고 바로 퇴장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러고도 사울 왕과 다윗 왕을 기름 부어 세우고 왕을 가르치고 선지자를 육성하는 일을 계속한다. “이젠 늙었다”, 상투적인 거짓말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역설적으로 사무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핵심 사명은 세대교체, 즉 새 시대의 출범
두 사람의 마라아는 누구누구란 말인가? 그 첫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마리아이고 그 다음 둘째 마리아는 로마 카톨릭이 섬기는 마리아다. 전자는 진짜이고 후자는 가짜이다. 성경의 마리아를 보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했었다.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온통 의아했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보충 설명이 따른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지리라”(눅1:35) 마리아는 즉각 순종했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8) 성경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단순하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서 수태를 수용한 마리아다. 그 뒤 성경에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호칭됐다. “성경에는 이 마리아에 대해 ‘주님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 ‘그 어머니’ ‘네 어머니’ 또는 ”내 주의 모친” “그 모친” “예수의 모친”이라고 불리다.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온 사실은 없다. 성육
전 국민이 코로나19로 대구가 생지옥 같았던 지난해 3월, 직접 트럭에 타고 대구 시내를 돌며 마스크를 나눠준 영화배우가 있었다. 바로 김보성씨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또 다시 대구로 달려갔던 김보성씨는 ‘의리의 사나이’로 소문난 배우다. 그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의리 신드롬’에 빠질 정도였다. ‘의리’ 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즉 인간의 기본 인성 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런 기본적 인성인 최소한의 의리마저 다 무너진 듯한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이 바로 암몬과의 전쟁이다. 형제국과의 전쟁 요단강 동쪽 나라 암몬은 요단강 서쪽 해안가의 블레셋과는 달리 사실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안 되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형제국이기 때문이다. 암몬은 모압과 함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 세웠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웠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신23:7)고 했고,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신2:19)고 했다. 서로 미워 하거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실 형제가 어릴 때는
마지노선은 1934년 프랑스가 독일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要塞地)으로 근대 축성(築城)의 획기적인 축성인데 전쟁 중 독일 공군에 의해 파괴됐다. 독일군이 이 마지 노선만 넘으면 프랑스에 큰 타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노선은 넘어서는 안 될 절대경계선이다. 이것을 빗대어 우리 생활에도 마지노선을 넘었으니 어쩌니 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나? 그 선은 지켜야 할 생명선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마지노선이 있다.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은 마지노선을 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마지노선을 범한 것이다. 일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일찍이 마지노선을 범했다. 마지노선 이전에 있어 야할 그가 그만 선을 넘었다. 그게 타락이요 범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 니라”(창 2:17) 이게 하나님의 마지 노선이다. 그런데 여자가 범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마지노선을 범한 후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