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여 성도는 역대에 부임한 교역자들을 잘 섬겨 끝까지 교회의 부흥과 안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930년 10월에 이덕근 전도인은 통장 직분을 받고, 예산 구역에서 사무를 관장하였다. 제11대 노재천 목사가 1930년 9월에 사임을 하게 되자 다음 달인 10월에 제 12대 광시교회 교역자로 부임하게 됐다. 이미 사역을 하고 있었던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로 사역하게 된 이덕여 통장은 1934년 9월, 현 소재지(2018년 7월 현재,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길 12)에 자력으로 목조예배당 14평을 건축했다. 1943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예배당은 폐쇄를 당했다. 일제가 패망해 조국이 해방되자 다시 1949년 10월, 현 소재지(2018년 7월 현재) 교육관 위치에 목조 14평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1950년 12월 이덕여 전도사가 예산 구역 통장 직을 사임하고 전주 덕성교회로 부임했다. 108년 교회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성장, 부흥하는 광시교회 광시교회는 제13대 유철주 전도사, 제14대 박경배 전도사, 제15대 이태진 집사, 제16대 이덕흥 목사, 제17대 방효태 전도사, 제18대 우제창 목사, 제19대 전석일 목사, 제20대 김상학 목사, 제21대
출생과 성장 그리고 신앙 이덕여(李德汝) 목사는 1899년 9월 7일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116번지에서 부친 이정회(개국開國466년<1857년> 4월 8일~대정12년<1923년> 8월 25일)와 모친 김정봉의 장남 이덕근(李德根)으로 태어났다. 본명인 이덕근 보다 이덕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덕근의 품성이 덕德을 베푸는 분으로 여겨져서 교단에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된 이름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덕근이라는 이름보다는 이덕여 목사로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문을 공부했으며, 부모는 그가 한학을 공부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1912년부터 7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으며, 한문 공부를 끝내기 일 년 전인 1910년 마을을 방문한 전도인인 이후로 전도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다. 그때가 1910년 6월이었다. 이덕근은 이후로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1910년 6월에 전 가족이 동시에 믿기로 작정한 후 이 전도사의 자택에서 처음 모여 예배를 드리고 광시교회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 계속 이 전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도에 충
신학교 학부도 졸업하기 전에 담임 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33년의 세월에 접어들었다. 한 가지 일에 30년의 세월을 걸어왔으면 달인이 되든가 프로가 됐어야 할 텐데 아직도 목회는 여전히 미숙하고 설교는 날이 갈수록 힘이 든다. 어느 시인은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 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써달라고 했다지만 나 역시 어영부영 하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후반전을 한 참 지나서 내리막 언덕 에 와 있다. 젊은 날에는 야심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참 많았다. 때론 나침판을 잊어버려 방향을 놓치고 헤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께는 잠간 쉬시라고 하고 나 혼자 나서서 무얼 해 보려다 실수도 했다. 목회 30년 동안 마당만한 터 위에 원두막 같은 예배당 건물을 짓고 수년 동안 빚 갚느라 헤매다가 몇 해 전 다시 손바닥만 한 주차장 하나 사놓고 또 다시 빚 갚느라고 허덕이고 있다. 사실 나의 목회 꿈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강원도 산촌 두메산골이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이 여러 분 계셨다. 그 중에 어떤 부모님들은 아들 이 군대를 가면 편지를 읽어드리는 일. 답장을 써 보내는 일을 어린 내게 시키시곤 했다. 아예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가장 각광 받는 사람은 웅변가였습니다. 이 웅변가들은 대중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이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민회나 심지어 엄숙한 법정에서까지 이 웅변가들은 유창한 웅변술로 광장에 모여 열광하는 군중들을 설득시키기도 하고, 통치자들의 국정의 중차대한 정책을 전달하기도 하고, 법정에서의 첨예한 송사를 유리하게 판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 웅변술은 출세의 필수적인 요건과 지름길로 인식했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웅변가들은 대부분 아테네를 중심으로 종교처럼 널리 확산됐는데 이 웅변술의 이론과 체계를 정립한 화법연구가 바로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 섬에서부터 시작된 수사학(修辭學)입니다. 이 웅변과 수사학은 그 시대 고등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채택되어 세속적인 출세의 야망을 가진 귀족들과 상류층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유아기부터 이 수사학과 웅변술을 가르치려고 앞 다투어 수사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웅변과 수사학에 대한 시대적이며 사회적 열정의 열매로 후에 플라톤의 서정적 대화인 “향연”이나, 이론철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고전문학이 세상에 존재하
신사도 논쟁을 벌이는 분들과 건강한 기도운동, 은사운동, 신사도운동에 대한 구분과 이해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어려서부터 제자훈련과 양육을 받으며 침례교신학을 하기까지 침례교 신앙을 배경으로 자라온 저는 복음주의의 한계를 고민하게 되면서, 내 신앙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의 갈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2002년 더콜 운동을 시작으로 소위 신사도 운동이라는 모임과 만났고 10년이 넘게 이 운동에 리더로 투신하며 이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신학적, 신앙적 갈등 끝에 그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십자가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자로서 책임이 있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 먼저 은사 종지론이나 은사 중단론을 믿는 분들은 이 논쟁에 참여할 조건과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아예 다른 신학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지켜나갈 성숙의 요구와 과제가 주어졌다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분열이… 주님의 몸을 찢음이… 다름과 틀림의 경계를 벗어난, 아집과 교만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나와 ‘다름’이 다
30년 전 내가 군목으로 사역하던 부대는 1개 대대가 대략 6개월씩 교대하면서 인천 해안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여러 부두와 해안을 따라 아홉 개의 소초와 3개의 중대본부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 부대 병사들 주일예배를 인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신자인 병사들은 지휘관의 재량으로 소초 근처 민간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대대장이 맡은 대대로 부대가 교체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장이 내게 이런 요청을 했다. 병사들이 주일마다 부대를 떠나 자기들끼리 민간인 교회를 오고가는 것이 지휘관으로서 너무 부담이 되니 나보고 와서 예배를 인도해달라는 것이었다. 항구 여러 부두에 흩어져 있는 소초의 신자들을 자기가 주일마다 차를 보내서 한 곳으로 모아줄 테니 수고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때 나는 이미 주일 아침 9시 부평에 있는 부대에서 첫 예배를 드리면 부천, 김포공항, 송도를 거쳐 다시 부평으로 100km가 넘는 길을 돌며 저녁때까지 하루 다섯 번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대대장이 부탁을 하는데다가 병사들을 모아준다는 중대본부는 내 이동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시간도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기에 그러마고 했다. 주
인간이 한 평생 세상을 산다는 삶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그 일생의 삶에서 겪는 희노애락과, 형통과 불통, 행복과 불행의 사연들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의 한 평생에 겪고 누리는 모든 삶이 나에게 남기는 보람과 소망은 무엇인가?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생동안의 삶과 그 삶을 담아내는 동안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의 가치와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나님과 함께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데 대한 가치는 무엇이며, 무엇을 신앙으로 산 삶에 대한 보람으로 여겨야 하는가? 옛날 어릴 때 이발소나 식당, 사람들이 붐비는 버스 대합실, 그리고 웬만한 가정 현관 등에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림을 배경으로 제작된 액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시가 생각난다. 바로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글귀다. 이 유명한 시인의 풀 네임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믿으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지나가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이 유명한 시의 주인공 푸시킨은 러시아에서도 뼈대
종교인 소득 과세가 시행된 지 3개월이 지났다. 사전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안이 확정된 관계로 교회 안팎에서 행정적인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민법과 소득세법 관련 법안 정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내 정관제정 및 개정이 가장 시급한 일로 부각되고 있다. 정부가 소득세법 시행령에 교회의 최고 의결기구 즉 교인총회(공동의회)에서 제정된 교회정관(교회자치규정)에 목회활동비에 대한 지급기준 등의 규정이 있으면 비과세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자 정관 제·개정의 목적과 취지는 물론 어떤 절차에 의해 제·개정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뒷전인 채 종교인과세에 따른 비과세 혜택을 받고자 하는 세금문제 중심으로 정관을 제·개정 하려고 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분위기여서 이에 따른 법적문제가 심각하게 우려된다. 문제는 이와 같이 효력 없는 임의적 정관 때문에 한국 교회가 심각한 분쟁을 겪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등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뿐만 아니라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관을 민법이나 소득세법보다 우선한 교회 운영 취지에 맞게 적법한 절차에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은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 목사 종교인 과세에 관한 글을 써볼 생각이 없나?”고 전화를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많이 망설였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몰수당하시면서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시고 짐승처럼 울부짖으셨다던 조부와 또 공직에 계시면서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 때문에 파산했던 선친의 아픈 추억과 조부의 유언으로 목사가 되셨던 선친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보니 세금을 내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세금을 내지 않는 다는 것이 무슨 특혜 같지만 성장과정에서 정상적인 국민의 권리를 별로 누리지 못한 절반만의 국민이었다. 대부분 목사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두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다. 첫째, 국가가 관습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던 것이고 둘째, 개척교회나 농어촌 교회의 열악한 현실은 세금 낼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목회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과세를 면제해 준다는 법적 제도적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우리민족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이래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 다만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쓰면서 불교에 조세를 부과한 예는 있지만 조선의 억불정책에 의
맥스 루카토의 ‘너는 특별 하단다’(고슴도치)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웸믹”이라고 불리는 “작은 나무 마을 사람들” 이 모여 사는 어느 마을 이야기다. 이 마을 웸믹들은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금빛 별표가 든 상자와, 잿빛 점표가 든 상자를 들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이들마다 서로 별표나 점표를 붙이며 하루를 보낸다. 재주가 뛰어나거나 잘 생긴 웸믹들은 항상 별표를 받았고, 보잘 것 없고 내 놓을 것이 없는 웸믹들은 잿빛 점표를 받았다. 온몸이 별표로 가득해서 번쩍거리는 웸믹들도 있었다. 별표를 받을 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으니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애를 쓰게 됐다. 하지만 웸믹들 중에는 재주가 없는 이들도 있어서 그들은 언제나 잿빛 점표를 받았다. 그 중에 펀치 넬로라는 웸믹이 있었는데 그는 남들처럼 재주가 있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남들처럼 높이 뛰어 보려고 해도 넘어지기만 하고 그럴 때면 웸믹들은 너도 나도 달려들어 잿빛 점표를 붙여 줬다. 넘어져 상처라도 나면 더 많은 점표를 붙였고, 왜 넘어졌는지 설명이라도 하면 “말투가 우스꽝스럽다”고 또 다시 점표를 붙였다. 점표가 많이 붙어 있다고 덤으로 점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명시 황무지의 프롤로그 속에 한 비극적인 노파가 등장한다. 쿠마의 무녀라고만 알려진 이 여자의 전설은 1세기 로마 시대 네로황제의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곤 48장 트리말키오의 향연”에서 인용된 노파이다. 희랍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 쿠마의 이 무녀는 신비한 예언력을 지닌 아주 유명한 여자였다. 이 여자의 예언력은 그녀가 섬기는 아폴로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어느 날 아폴로 신이 자신을 극진히 섬기는 이 여인에게 ‘네가 가장 원하는 소원이 무엇이냐?’ 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쿠마의 무녀는 자신의 손안에 든 먼지만큼의 많은 햇수의 장수를 달라고 간청해 아폴로 신으로부터 장수를 허락 받았다. 그런데 무녀는 장수를 구할 때, 그 장수만큼의 젊음도 함께 달라는 간청을 잊어버렸으므로 나중엔 너무 늙고 메마르다 못해 결국 곤충처럼 쪼그라들어 조롱(鳥籠)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새장 속에 갇혀있는 곤충이 되어버린 이 비참한 노파를 구경하러 온 아이들이 노파에게 물었다. “무녀야! 네 소원이 무엇이니?” 이 때 이 늙은 노파는 절규하듯 대답했다. “난 죽고 싶을 뿐이야!” 작가는 편파적인 생각으로 사는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이 지천인 현대인들에게 이 질문은 웰빙에 관한 질문으로 들리겠지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산상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부분을 발취한 말씀이다. 처음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내게는 안정되고 또 동기들이 가고 싶어 하는 교회에 부사역자로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사역지가 없는 친구가 너는 집안에 어른들이 다 목사님이니까 자기가 갈만한 교회를 추천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그 교회를 양보하고 내 손에 단돈 일원도 없이 대한민국 지도를 펴놓고 오직 이 말씀만 의지하고 인구 십만이 넘는 도시로 침례교회가 없는 도시를 찾아 간 것이 내 첫 목회지였다. 내가 침례교회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약 120년 전 반가의 여인었던 한 여인이 침례교도가 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셨던 분이 나의 증조모셨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잠자리에 누워 내가 침례교도의 후손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침례교정신에 사로잡혀서 산다. 내 처음 목회지, 목회지라고 해봐야 아무것도 없는 삯 월세 달랑 단칸방 하나가 신혼부부 방이고 또 교회였지만 두렵지 않았던 것은 고인이 되신 선친께서 아무연고도 없는 곳으로 목회를 떠나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얻
금년 성탄절에는 호박꽂이를 넣은 시루떡을 만들어서 교우들과 함께 나눴다. 올해는 특별히 떡 한 가지를 더 했는데 무설기 시루떡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시골에서 싸레기 쌀가루에 무를 듬뿍 넣어서 시루에 쪄서 온 가족이 먹던 생각이 나서 연세가 드신 어르신 교우 들게 향취를 느끼게 해드리면 좋겠다 싶은 뜻에서 한 일이다. 광고시간에 담임목사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 성도들은 무설기를 드리고 그 외에는 찹쌀시루떡을 나눠 드린다고 했는데 막상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무설기떡을 보더니 너도나도 무설기파로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완전무설기 대박이 난 것이다. 사실 젊은이들은 무설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호기심에 몰려든 것 같다. 사실 무설기 떡이 가난했던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던 기억이다. 오늘은 지면을 빌려 어려서 부흥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무설기떡에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한다. 어느 날 목사님은 지나는 길에 그 교회 연세가 지긋한 어느 집사님 댁을 예고도 없이 심방을 하시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심방을 미리 알리고 날자와 시간을 약속을 잡지만 통신 수단이 별로 없던 옛날에는 아무 때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성도님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기도해 드리
기독교 신앙에서 죄인 된 우리에게 ‘용서’ 라는 말 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들리는 말이 있을까? 이 ‘용서’라는 말을 ‘죄 사함’이라는 말로 변환시키면 ‘칭의’와 ‘구원’과 직결되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되며, 모든 기독론의 근간이 될 정도로 신앙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시대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며, 이 하나님의 인격이 의(義)이신데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활동의 최종적 결과가 용서임을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의 용서의 극치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증명 하셨다. 문학에서 ‘테네시 윌리암스’의 “올페”는 이 ‘용서’의 가치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레이디’는 비운의 여인으로 소개된다. 여주인공 ‘레이디’의 부친은 가난한 이태리인으로서 만돌린이라는 악기와 푸른색 옷을 입힌 원숭이를 데리고 어린 딸 ‘레이디’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 남부에 금주령(禁酒令)이 내리기 전까지 그의 아버지는 술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원숭이의 재롱을 보여주며 술 취한 주객들로부터 동전을 구걸하는 남루한 악사로 삶을 연명
지난 9월 기독교한국침례회 107차 총회에 3박 4일을 참석하면서 올해 총회는 나에게 있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 총회로 기억된다.특히 교단에 산적해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작금의 현실들을 보면서 가슴 아프기도 하고 또 깊이 생각하게 하는 동기도 됐다. 현대인들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현상은 목회자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들은 깊이가 없고 대화라고 나누는 것들이 고작 가십거리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소크라테스의 인생 명언가운데서 한 문장이 생각난다. “숙고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침례교회는 개교회주의라는 명분아래 숨겨진 미묘한 이기주의에 익숙해 있어서 교단의 현재와 미래에 별 관심 없이 살아온 나날들을 깊이 반성하고 숙고하면서 우리 교단을 느낀 것은 작금의 우리 교단의 상태가 아포리아(혼란, 난제)의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지 심히 염려가 된다. 총회를 참석할 때마다 늘 놀라는 것은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은 어떻게 저렇게 논리적으로 자기 의사를 잘 전달하며 말을 잘할 수 있을까 감탄과 부러움, 그리고 나도 저들처럼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의장은 내가 손을 들면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