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후순위로 미룬다. 자신의 지역구의 예산확보에는 번개같이 움직이다가도 서민 전체에 영향을 주는 민생법안 처리에는 민달팽이가 되어 버리는 어느 나라 국회의원들이 이 명제를 잘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투표의 성패가 달려있는 자신의 지역구의 주민들 앞에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재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반 국민들 앞에서는 법률제정권을 무기로 ‘갑’이 되는 것이다. ‘갑’의 위치에 서는 기업이나 조직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분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는 ‘을’ 위에 왕처럼 군림하는 등 최대한의 ‘갑’의 권력을 누리려는 욕망으로 충만해지기 마련이다.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자신의 왕위가 공고해진 직후 요나단의 자녀들의 근황을 수소문했다. 그는 스스로 ‘갑’의 위치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시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을’의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처리해도 될 일을 급하게 서둘렀던 다윗의 행동 속에서 그의 고귀한 인격의 수준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먼저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던 요나단을 생각했다. 요나단은 사울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자신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최고의 복음의 사도에 걸맞은 수많은 고난과 싸워야 했다.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유대인들의 위협과 참소로 인하여 늘 생명의 위협과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았다.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는 고난도 겪어야만 했다. 그는 이 모든 고난을 기꺼이 감당했다. 하지만 그 많은 고난들 중에서도 그의 몸에 박혀있던 ‘육체의 가시’는 정말 참기가 힘든 것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곱추였다는 설, 선천성 말더듬이였다는 설, 심한 안질이 있었다는 설, 간질이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의사 누가가 사도바울을 계속해서 동행했다는 점과,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의 가시는 간질이었다는 주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세 번이나 이 가시를 제거하기 위하여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응답을 주시고는 사도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셨다. 인간적으로 섭섭함을 가질 수 있는 거절이었다. 육체의 가시 없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상황을 상상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거절이었다. 웬만한 사
찬양은 불러주시고 은혜주신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없다. 노래, 악기, 춤, 선행, 그림, 조각을 포함한 그 어떠한 방식도,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모두 찬양이 될 수 있다. A. Nygren에 의하면 믿음의 핵심은 주님사랑이다. 찬양이 믿음의 고백이자 표현이고, 믿음은 주님사랑이므로 찬양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 된다. Wes. Sutton이 작사 작곡한 유명한 찬송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뵙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는 주님께 고백하는 찬양자의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이 찬송시가 로맨틱한 선율과 하나로 잘 엮어져서 주님과 영적으로 연애하는 분위기를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평생에 걸쳐 찬양하며,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다윗이다. 그의 노래가 시편의 150개의 찬송시들 중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니, 시편에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왕의 찬양하는 모습에서 왕의 체통을 깎아먹을 만한 것이 있었다며 자신의 남편을 비난했던 미갈을 향하여,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세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영적 집중력’에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갈릴리호수의 물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았던 베드로가 오직 예수님께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가 누렸던 기적의 시간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물위를 걸었던 그 짧은 시간은 베드로의 마음이 빈틈의 여지없이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며 그와 하나가 되었던 순간이다. 완벽한 찬양의 순간도 이와 같다. 찬양받으실 주인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찬양으로 나아가는 자는 찬양의 시간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하고, 그분만을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두 마음’을 품고 찬양하고자 하는 자는 찬양에 실패할 수밖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찬양자를 비난하는 미갈을 향해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두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기억과 감사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찬양은 찬양의 대상을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이다. 경배는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대상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찬양의 본질인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칭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칭송은 공개적인 것이 원칙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감안한다면 비공개적인 것도 가능하다.무엇을 칭송하는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이다.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들음과 체험이다. 들음은 로마서10:17에 기록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신 것과 같이 주님에 관한 기록인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법궤가 다윗성에 무사히 이송됨으로 인하여 기쁨의 찬양으로 충만했던 다윗이었다. 하지만 찬양의 열정으로 뜨거웠던 그를 향해 부정적인 말과 어투로 힐난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아내 미갈은 영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다윗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은 다윗으로 하여금 미갈을 향해 강력한 교훈의 입을 열게 하셨다. 다윗이 미갈을 향하여 선포했던 이 말씀은 촌철살인의 예언적 설교로 손색이 없다. 이 말씀은 미갈 뿐만 아니라 찬양에 무지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교훈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첫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는 영적인 시야가 열린 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은 믿을 게 못된다. 프리즘이라는 장치가 없으면 빛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친구가 어느 늦은 밤에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았던 적이 있다. 밤이 깊어 다른 곳은 문을 다 닫았고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열려 있던 셀프주유소를 찾았다. ‘5만리라’를 현금투입구에 넣은 후 기름을 넣고 있는데 기름통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5만리라’면 기름통의 약 절반 정도밖에 채울 수 없는 금액인데 이상하게 흘러넘쳤다. 아뿔싸. 경유주유기를 들고 휘발유주유기로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경유를 가솔리나(Gasolina, Gasolio)로 부르고, 휘발유는 특별히 벤지나(Benzina)라 부르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가득 넣었으니 초비상이 걸린 셈이다. 당장 차를 뒤집어서 기름을 다 토해내야 하는데 새벽 1시에 도와줄 직원이 있겠는가? 불행 중 다행으로 이미 밑에 조금 깔려 있던 휘발유 덕분에 기적적으로 차의 시동은 걸렸다. 길길거리는 소리를 내며 집까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차는 며칠 뒤 고속도로에서 엔진이 눌어붙어 완전히 죽어버렸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었던 그날 밤의 사건으로 인해서 바로 그날 낮에 맛보았던 뜨거운 영적 체험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밀라노한인교회의 임마누엘찬양선교
블레셋이 골리앗을 앞세우고 히브리군대를 위협하고 있을 때 사울왕은 골리앗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골리앗에 맞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사울왕은 많은 재물을 포상하고, 가문의 세금을 면제해 주며,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어걸었던 것이다(삼상17:25).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골리앗을 무찔렀다. 베들레헴출신의 촌놈 다윗이라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적적인 승리에 많은 히브리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추종하는 사태로 발전하자 사울왕은 다윗을 견제하려는 옹졸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했다. 사울왕은 애초에 내걸었던 현상조건을 변경해 일방적으로 또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블레셋남자들의 생식기 100개를 가져오면 자신의 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이 조건은 블레셋남자 100명을 반드시 죽여야만 채울 수 있는 조건이므로 내심 다윗을 전투 중에 죽게 하려는 속셈이었다(삼상18:25). 하지만 사울왕의 계략은 완전히 빗나갔다. 죽으라는 다윗은 죽지도 않고 오히려 200개나 되는 포피를 확보해 의기양양하게 사울왕 앞에 나타났다. 사울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딸 미갈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다행스
요즘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활발하다. 세상살이가 복잡다단하고 바빠서 실제로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단체 채팅 등의 방식으로 동창회도 하고 각종 계모임도 하며 활력을 얻는다. 동창들이나 친구들의 성공적인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한다. 이러한 면에서 온라인상의 채팅방은 긍정적인 소통방식이다.그러나 이러한 소통방식이 때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체면이나 자존심으로 인해 본심을 숨기는 사람들에게 다른 동창들이나 친구들의 화려한 성공소식이 오히려 의욕저하라는 부작용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물론 실제보다 부풀려서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지만, 필요이상으로 남에게 자신을 비교하며 비관하는 사람들이다. 친구들의 성공이 나를 위축시키고, 친구들의 행복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 이러한 부러움은 필경 시기심이나 미움으로 변질된다.열정적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저렇게 요란을 떨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가?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가
유도에 패자부활전 규정이 있다. 8강 진출자들은 우선 A1, A2, B1, B2 그룹으로 나뉘고, 각 그룹 승자가 4강에 진출한다. 8강전에서 진 4명의 선수들은 A, B 그룹에서 패자부활전을 펼친다. 이후 4강전에서 결승에 오르지 못한 2명이 내려오면, 패자부활전에서 이긴 2명과 엇갈려 싸우는데, 여기서 나오는 2명의 승자에게 동메달을 준다. 4강에 올랐어도 동메달을 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8강에서 지더라도 동메달을 딸 수 있는 것이 유도패자부활전의 묘미이다. 태권도에도 패자부활전이 있다. 유도처럼 동메달리스트도 2명이다. 그러나 경기 방식은 조금 다르다. 결승에 진출한 두 선수에게 패한 선수들은 4강에서 패한 선수들과 맞붙어 동메달을 노릴 수 있다. 첫 경기에서 패했어도 자신을 이긴 선수가 결승까지 진출한다면 동메달을 획득할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는 것이다. 강한 선수에게 한번 패했다고 끝이 아니라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가 이 제도에 들어 있다.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이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손도 안 대고 큰 성 여리고를 무너뜨렸던 히브리 백성들은 교만해져서 여리고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과의 전투를 아주 쉽게 생각했다.
계시록 5장, 14장에 등장하는 ‘새 노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새 노래’가 낯선 음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하나의 찬송가만 부른다 할지라도 부를 때마다 감동이 일어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뜨거워진다면 이 찬송가도 새 노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보편화하기 어려운 극히 드문 사례이다. 이것도 혼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전체 회중이 함께 하는 회중찬양시간에는 개인의 특수성을 보장해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30분에서 한 시간까지 이어지는 회중찬양시간 내내 똑같은 찬송가만 부를 수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찬양시간은 기쁨의 시간이 아니라 엄청난 고문의 시간이 될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노래만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찬양의 열정이 부족하다. 오랫동안 불러온 것이니 악보를 보지 않고도 노래가 술술 나온다. 레코드 틀어놓은 것처럼 자동으로 찬송가가 흘러나오니 편하다. 몸도 편하고 머리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주님 생각 없이도 노래할 수 있다. 감동도 없고 눈물도 없지만 잘 부를 수 있다. 딴 생각하면서도 박자 하나 틀리지
신참들이 먼저 품삯을 받다니?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시간 일한 자에게도, 12시간이상 일한 자들에게도 품삯은 동일했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더 고생한 고참들은 더 많은 품삯을 기대했으나 저들의 꿈과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분노가 치민 고참들은 주인에게 대들었고, 주인도 한 발 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인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는 역설적인 단호한 말로 결말을 지어 버렸다. 일찍 들어온 일꾼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에 대한 열심이 감소하게 되어 건성으로 일을 마치게 된 것과는 달리, 늦게 들어온 일꾼들은 미안한 마음에 정말 열심히 일했을 것이며, 일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일을 마치게 되었을 것이다.아마도 주인은 작업량보다는 일꾼들의 뜨거운 마음을 더 원했던 것 같다. 설교는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기도도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회중찬송가의 무한 반복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어떤 교인은 평생 똑같은 찬송가만 부르고, 회중 전체가 찬양할 때도 그 찬송가만을 부르기를 원한다. 어떤 목회자도 자신이 익숙한 찬송가만 주보에 올린다
블레셋으로부터 법궤를 돌려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자신들의 마을로 들어온 것을 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저들의 영적 무지로 인해서 그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실 기회를 날린 정도가 아니다. 법궤를 구경하다가 무려 50,070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레위인이 함께 있었지만 그 역시 영적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정확한 제사법조차 몰랐으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경내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치워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 중에서 법궤를 모실 수 있는 다른 레위인을 찾았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벧세메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레위인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벧세메스로부터 14.5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이었다. 그러나 법궤로 인한 비극은 계속 되었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70년이나 머물렀지만, 그 역시 그의 아들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웃사가 다윗성으로 법궤를 이송하는 도중 급사한 이유를 대부분이 레위인이 꿸
아비나답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몇 년 동안이나 법궤를 모셨을까? 설교하는 목회자들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크게 ‘20년설’과 ‘70년설’로 나뉜다. 20년설은 사무엘상7:2에 기록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로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에 근거한다. 성경에 20년이라고 명문화되어 있어서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사무엘상7:2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20년설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20년설이 명기된 사무엘상7:2이 기록될 당시에 사무엘이 주도했던 미스바대성회가 있었다. 사울왕도 등장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상7:2에 기록된 20년이라는 기간은 벧세메스로부터 이송되어 온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던 기간을 미스바대성회를 기점으로 계산한 것이다.미스바대성회 이후에도 50년 이상 법궤는 계속해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무른다. 사울왕의 집권기간 중에도 역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아비나답의 집으로부터 법궤가 다윗성으로 이송된다. 따라서 70년설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아비나답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개역개정 성경에서 사무엘하6:5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로 기록했다.KJV성경에서 사무엘하 6:5은 “하프와 쏠터리와 탬버린과 뿔나팔과 심벌즈”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노래와, 하프와 쏠터리와 탬버린과 심벌즈와 나팔”로 기록하였다. NIV성경에서 사무엘하 6:5은 “하프, 리라, 탬버린, 딸랑이, 심벌즈”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하프와 리라와 탬버린과 심벌즈와 트럼펫”으로 기록하고 있다. NASB성경에서 사무엘하6:5은 “리라와 하프와 탬버린과 캐스트넷츠와 심벌즈”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리라와 하프와 탬버린과 심벌즈와 트럼펫”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법궤를 이송할 때에 다윗은 화려한 무용을 동반한 음악연주로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 악기편성은 사무엘하기자와 역대상 기자가 다르게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번역본 마다 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번역된 성경들은 번역본마다 번역이 다르고, 또한 잘못 번역되어서 바로 잡아야 할 부분들
희망차게 시작한 한 해가 어느덧 2019년의 마지막 달을 맞이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다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보냈으리라 믿는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살아온 시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계획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한 해 동안 어떤 열매를 맺고 무엇을 남겼는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초점이 맞춰졌기를 바란다. 한 해를 시작하며 진행했던 성경통독, 말씀 묵상, 새벽기도 등 신앙의 영적 성숙을 꿈꿔왔지만 아직은 달려가야 할 길이 멀 수도 있을 것이다. 2019년은 어느 때보다 세상논리 속에 진영논리로 갈라져 교회 안팎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여전히 성경의 진리와 말씀을 뒤흔들며 교회가 나눠지고 서로가 반목의 길을 걸어왔다.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성 정체성도 양성평등, 젠더평등 등을 외치며 고귀한 성을 붕괴시키는 도전도 계속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뉜 한국사회에 기독교마저 그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누구 하나 대화와 타협의 장보다는 극단적인 정서는 앞으
오는 12월 20일 임시총회가 열린다. 임시총회 안건으로는 108차 특별감사 관련과 총무선출 등 두 건이다. 제109차 총회는 지난 108차 회기의 재정과 행정 등 지난 109차 정기총회에서 보고받지 못한 사안에 대해 특별감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감사 결과를 임시총회에 보고 받기로 결의한 바 있다. 109차 총회 특별감사위원들이 108차 회기의 각종 행정과 재정 상태 등을 현재 조사하고 있다. 감사위원들은 임시총회 때까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조사를 하기 위해 진행과정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임시총회는 교단의 중대한 사안이 발생하거나 100교회 이상의 교회 청원 또는 총회 임원회의 결의를 통해 임시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총회가 신뢰를 받고 개 교회와 지방회가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번 특별감사가 명확하게 보고되기를 대의원들은 바라고 있다. 더 이상 총회 사역이 개인의 유익이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철저하게 지양해야 한다. 그런 만큼 특별감사 위원들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끝까지 일해주기를 바란다. 총회장은 한 회기의 주요 사업과 임원회 회의록 등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108차 집행부는 재정 등 불신으로 막을 내렸다. 누구의 잘못보다
12월은 침례교회가 사실상 태동한 달이다. 2019년의 첫 시작을 반기며 출발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태풍의 피해를 넘기고 매서운 찬바람이 우리 곁에 어느새 다가왔다. 올해는 말콤 C. 펜윅 선교사가 내한해 조선 즉 한반도에 복음을 전파한 지 1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말콤 C. 펜윅은 1889년 12월 8일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고, 1935년 12월 6일 그의 주 활동 무대였던 원산에서 주님의 품에 안겼다. 12월이야말로 말콤 C. 펜윅 선교사를 기리는 중요한 달일 수밖에 없다. 올 한해가 거의 다 지나갔다 하더라도 우리교단의 말콤 C. 펜윅 130주년은 이제 새로운 시작임을 의미한다. 침례교는 펜윅 선교사에 대한 책도 나오고 영적성장대회를 말콤 C. 펜윅 130주년 기념대회란 이름으로 치르는 등 올 한해 상반기를 말콤 C. 펜윅 선교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난다면 그야말로 말콤 C. 펜윅 선교사를 하나의 이벤트로 소모해버리는 결과로 남게 된다. 상반기에 말콤 C. 펜윅 선교사를 조명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하반기는 이를 기리고 침례교의 미래를 향해 어떠한 비전이 제시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이 우리 앞에 숙제로
#장면1 2014년 11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각 교단 목회자를 초청해 개인이 속한 교단의 정체성과 장단점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총평을 담당한 손봉호 교수는 “각 교단의 강조점의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침례와 여성 안수 외에는 교단 간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고, 평신도들은 대부분 그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며 “교단은 오직 목회자들에게만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평신도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날 월례회에 발제자로 나선 각 교단 목회자들은 교단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면2 침례신문에 입사한 후 침례교회를 다니기 위해 교단에 이름난 몇 교회에 출석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청년부 사역자 대부분이 침례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단 소속 사역자라면 의무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문에 관심을 갖고 이를 통해 교단의 현황이나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됐지만, 그동안 대화를 나눴던 청년부 사역자들 상당수는 이러한 일에 신경을 쏟는 이들을찾아보기란 힘들었다. #장면3 109차 총회는 지난 10월 17~18일 여의
매년 11월이 되면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다양한 감사를 드리는 행사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통상 11월 첫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는 한국교회는 1년 동안의 결실인 오곡백과를 놓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 기쁨과 은혜를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추수감사절에 대한 절기의 의미를 한 번 쯤 되새겨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영국 성공회의 탄압과 억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척박한 신대륙 땅에서 곡식을 일구고 첫 해 수확한 결실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결실을 이웃 인디언들과 나누면서 시작된 절기이다. 특별히 생존의 위협과 미지의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주민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추수감사절은 더 뜻깊은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우리 한국교회도 매년 추수감사절은 풍성한 축제와 같은 시간이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특별한 애찬을 준비하고 떡을 쪄서 이웃들에게 추수감사의 의미를 함께 나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선교지에 보내기 위한 다양한 물품과 헌금들을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활용했다. 그만큼 모든 교회는 여유가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