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곤 목사 새울산교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는데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누구의 말인지 확실한 출처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꿈을 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어 사람도 물자도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봉쇄된 상태에서 여러 날이 지나자 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성안에는 굶주림이 극에 달하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자식을 잡아먹는 비극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매우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사마리아성 밖에는 나병환자 4명이 며칠째 굶주리고 있었다.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제안하기를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도 굶주리고 있으니 죽을 것이고 여기 있어도 죽을 것이니 우리가 아람 군대로 가서 항복하자 혹 살려 주면 살 것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모두 절망적일 때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해질녘에 아람 군대를 향하여 네 명의 나환자들이 걸어갔다. 며칠씩 굶은 환자들이 힘없이 걸어가는데 하나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안에서 남은 삶을 이해하고, 주인 되신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 안에서 남은 삶을 조정하며,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섭리와 인도 안에서 남은 삶을 세워나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남은 생만큼은 부활예수의 산 증인답게 머리 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고,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여, 날마다 내가 주인이 된 자리로부터 겸손하게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생각과 계획을 알기 위해서라도 혹은 묻기 위해서라도 그 말씀 앞으로 진지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신 그 교훈과 명령 그대로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나의 안과 밖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드러나게 하소서. 이처럼 귀하고 귀한 남은 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진하고 강하게!
에베소서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어둡고 부패한 세상의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활개를 칠 때면, 여지없이 예수님의 자리와 가치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탐욕으로 물든 사람의 주장과 업적들로 소란을 피우기 마련입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어져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옛사람의 악성과 악습이 통제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면, 여지없이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은 부담스러운 과제로 남겨지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의 방식과 변명들로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동서고금,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하나님 중심을 벗어난 세상과 사람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혹은 얼마 동안이라도 더 없이 안전해 보이고, 더 없이 확실해 보이는 갖가지 이유들이라도 때가 되면, 결국 퇴색되고, 대치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어리석은 반응입니다. 하여,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상(實像)을 오늘도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안내자를 오늘도 믿고 따라가고 있음에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나의 신념으로 믿는 것과 성령님의 역사로 믿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믿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믿어지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 믿어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어지니, 시간을 더해갈수록 자원하지 않을 수가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말씀이 구구절절 마음 가운데 심겨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고, 성숙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어진 그대로 행하기를 부단히 훈련할수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도 나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철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겸손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간구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이미 믿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답
신앙과 이성에 대한 전망 연구자의 목표는 신앙과 이성의 긴장과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신앙을 발견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이 분리된 시대에도 신앙과 이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성은 우리가 맹목적인 믿음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신앙은 이성의 활동에 풍요로운 의미와 맛을 부여한다. 신앙과 이성은 원래부터 인간의 문화와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였다. 새는 날기 위해 두 날개가 필요하다. 진리를 향해 우리가 날 수 있었던 것은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이성의 빛만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오류가 이성주의, 합리주의이다. 또한, 신적 은총으로 이성이 정화되어 계시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이성의 가능성을 불신하는 것이 허무주의로 흐르게 한다. 이러한 양극단으로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신앙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고 철학을 신학으로 도입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은 언제든 오류 가능성이 있고, 비판되고 수정될 여지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기독교적 이성을 회복해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2.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눈 여겨 볼만한 대표적인 학자는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800여년이 지나고 아퀴나스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진리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다. 이성은 자연의 빛에 의해, 신앙은 은총의 빛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봤다. 그는 계시는 이성을 전제로 하며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계시가 없이도 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 문제점을 남겨 놓게 된다. 이성에 ‘자율성’(autonomy)과 ‘자기 충족 성’(self-sufficiency)을 부여하여 이성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Ⅲ. 신앙과 이성의 균형 종교적 신앙과 이성적 인식의 문제는 기독교 철학의 중심 과제일뿐 만 아니라 조직신학, 변증학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로 인한 질문은 다양하다. 예를 들면 믿음이 먼저인가? 아니면 앎이 먼저인가? 신앙이 이성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이성이 신앙에 의존하는가? 이성은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성과 신앙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인가? 합리주의와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을 자각하기 이전 2000년 가까운 서양의 역사를 지탱한 것은 바로 기독교였다.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고작 300년 남짓이다. 그 기간 동안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과 인간 이성에 대한 자각은 어느덧 종교와 신앙을 낡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과 계시라는 종교가 어색하지만 여전히 공존하고 있고, 그로 인해 예기치 않은 갈등이 벌어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오늘의 현대사회다. 그렇다면 과학의 시대를 살며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에게 초월
신앙생활을 할 때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기도를 잘 하지 않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기도도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되어 있어야 야베스처럼 기도의 “능력자”라고 칭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도의 원리는, 기도할 때 기도자의 관점, 시선,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역대기의 저자가 의도를 갖고 족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으며, 유다 족속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유다 족속이 포로 후기 공동체의 중심으로 세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왜 야베스의 어머니가 고통 중에 야베스를 낳았다는 표현을 기록했을까요? 유다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유다 족속의 기록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는 야베스 삶의 기록이 부정적인 표현으로 얼룩지어진 것은 선 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본문은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을 분명하게 풀이까지 해주는데, 야베스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단어에서 왔다라고 밝혀줍니다. 히브리어에서 고통이라는 단어의 자음 위치를 바꾸면 야베스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자음의 순서가 됩니다. 우리말로 정확히 묘사하기는 힘들지
에베소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후로도 무엇을 더 가져서 혹은 무엇을 더 배워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구나 나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넉넉한 마음과 자원을 매순간 받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오늘의 삶이나 남은 생애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투명하고 친밀한 관계만큼 더욱 맑고 밝게 세워지고 풍성해진다는 진실을 어떤 형편 중에도 잊지 않고, 잃지 않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여, 오늘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자원을 충만히 채우게 하소서.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라가게 하소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애당초에 나에게는 없었던 영적이고 정신적인 자원을 지극히 제한된 생애임에도 불구하고, 진하게 경험하고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에게는 절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일은 나와는 전혀 무관할 수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하여, 오늘도 나의 눈과 귀가 약속의 말씀으로 더욱 맑고 밝게 열리게 하소서. 어느 새 또다시 흐트러진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더욱 넓고 깊게 정돈되게 하소서. 이즈음의 과정도 그리고 이후로 얻게 될 열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더욱 아름답고 귀하게 채워지게 하소서. 남은 생을 통해서도!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하여, 그말씀 그대로: 베드로전·후서' 저자
이에 오창희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예수는 단순한 마음으로 찾아야 가능하고, 그리스도 이후에는 사변이 필요 없다는 다소 강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 말은 신앙과 이성, 종교와 철학을 완전히 떼어놓는 것이고, 대립적인 걸로 보는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건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고, 불합리하다는 건 이성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고 종교적으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신앙과 이성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신앙의 초월적 측면을 잘 드러내고는 있으나 너무 극단적이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철학이나 문화 활동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다는 사실이다. 덴마크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인 동시에 19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로 알려진 키르케고어 역시 신앙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유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아케다(Aceda) 사건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데 이런 명령을 따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아브라함에게 무조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
에베소서 1장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를 지금도 잘 알고 있다면, 남은 생도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자원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보하거나 절제하면서까지 나의 안과 밖을 살리고 세우는데 집중하려 합니다. 이즈음에 또다시 더해진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영적인 책임감 앞에서도 수고하고 땀 흘리기를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나아가 오늘도 살아 있음에 더해진 갖가지 자원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에 따라 지혜롭고 정직하게 관리하며 유통하려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교훈하시고 명령하시는 그 길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월의 흐름만큼 반드시 더욱 깊이, 더욱 멀리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더욱 맑고, 더욱 밝게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 위에 남겨진 흔적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참으로 믿을만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여, 깨어 있는 그리
나는 호세아 4장 6절을 토대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번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봤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추구하는 것,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호 6:1, 3). 간단히 한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예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선 “내가 너희 중에 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18개월 동안 머물던 때를 말한다. 그 당시 사도 바울 앞에 전 세계가 열려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행하셨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근본적으로 삶이 변할 뿐 아니라, 때로는 도시들이 변화됐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 사역 후기에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빌립보서 3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빌 3
신앙에 대한 이성적 사유가 대두된 것은 무엇보 다도 타문화 속에 드러난 자신을 이제는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다. 타종교를 대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자신의 종교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문제는 기독교는 초대교회부터 타종교를 경험해 왔으며, 그런 역사적 경험을 통해 타종교에 대한 다양한 태도가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를 대하는 최선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던 시대이다. 철저히 신중심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이제 중세를 지나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 시대의 지배자로 등극한 21세기에 과연 신앙은 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성은 신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신앙과 이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반목하면서도 공존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며 세계의 종교로 변신하는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새롭게 정립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성경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부분은 사도행전에 잘 드러나 있다. 바울이 아덴에 전도하러 갔을 때 바울이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만나 최초로 쟁론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6~8) 그러나 바울의 초점은 선교였고, 철학자들의 초점은 학문적 토론에 두었기에 이 둘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입장을 보였다. 즉 바울과 철학자,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는 서로에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바울의 여정을 드려다 보면 초기 철학이 추구하는 이성의 절대성으로 기독교 신앙이 변질되고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우려로 철학에 대한 경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골로새서에 잘 드러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