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는 최순실이라는 무당의 지시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통치한 것이 드러나면서 온 국민은 대통령에게 배신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허탈감을 전국적으로 5차례의 촛불시위를 통해 분출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에게 종교와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가를 실감하고 있다. 행복심리학자들은 사람의 행복에 필수적인 요소로 사람(관계)과 밥(음식), 종교, 그리고 대화를 꼽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손도손 대화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장면을 떠 올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배후에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ultimate concern)라고 표현하였다. 종교적 세계관은 왜 중요한가? 한 사람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관, 즉 종교는 삶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와 같다. 우리의 믿음과 언행은 세계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마치 우리가 쓰고 있는 선글래스와 색안경과도 같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종교는 우리에게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바라보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고 예수님은 첫마디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금년은 12월 18일이 주일이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5년 전 1991년 그해 9인의 사형수 중에 마리린 몬로의 비명사한 36세 나이와 같은 강영리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와 눈이 맞아 7년 전 남편을 교살(목 졸라 죽임)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모도 교살하려다 미수범으로 발각되자 두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내고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 받아 대법에 항소했으나 기각으로 사형집행이 확정되었다. 다른 죄수들은 그해에 사형집행이 되었으나 강영리는 늦게나마 감옥에서 복음을 받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 금식기도로 참회하며 다른 죄수들을 사랑하여 베풀고 열심히 전도하여 80여명이 회개하는 모범수가 되는 바람에 5-6년이나 덤으로 옥중에서 연명하게 되었다. 치정과 돈에 빠진 포악한 살인마가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으나 91년 12월 18일 오후 2시 교도관의 호출로 감옥문이 열리자 그녀는 접견인줄 알고 기뻤으나 교도관이 사형집행이라 할 때 잠깐 놀라 당황하다가 곧 침착하게 추스르며 아래와 같이 유언했다. 남은 영치금은 동료 죄수들에게 돌리고, 묘지는 전주 문중산의
뜻밖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제자들은 신앙생활에 힘쓰는 대신에 디베랴 호수로 간다. 부활의 증인인 제자들은 그곳에서 밤새 그물을 던진다. 그런데, 이랬던 제자들이 예수의 승천 이후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바로 이 제자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면서 기독교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시대의 한 부분에서 같은 종말론을 소유한 가치 공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신다(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역사적으로 실현된 예루살렘의 재앙과 성전 파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성취 과정을 미리 체험하게 한다. 줄의 한편 끝을 잡아당기면 이어진 다른 끝부분이 당겨져 오듯이, 우리 시대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종말의 궤도에 놓여있다. 상상 그 이상의 격변인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대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1.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로마서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서로 구분하는 듯한 표현이 있다(4:25, “예수는
세월호 그 아픔이 바다에 잠겨있고 젊음의 청춘들이 병들어 신음하는 삼천리 밝히는 불이 촛불이냐 하는가 감춰진 굿소리가 이제는 천둥같이 대놓고 온 나라에 둥둥둥 울리는 것 귀신의 곡소리처럼 음산하게 들리네 성령의 불 붙여서 촛불은 내려놓고 말씀이 살아 있어 새 마음 불타도록 이 나라 이 민족 위해 무릎꿇자 성도여! 이재옥 목사는 부평중앙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현재 목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이 동네 구두수선공을 알게 된 것은 20여년 전으로 돌아간다. 유명회사의 (브랜드)가 있는 가방 끈을 고쳐달라고 내밀었더니 자기 전공분야기 아니라 하면서 일언지하에 수선거절을 당한 사건으로 인해 그를 알게 되었다. 자기는 구두수선공이지 가방수선공은 아니라서 가방을 잘못 고치면 어쩌나 생각하는 직업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까짓 대강 고쳐주고 수수료 받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다. 구두수선에도 전공 버전공이 있다는 철학이었다. 이번에는 등산용 막가방의 손잡이가 떨어졌기에 이것을 큰 바늘로 쿡쿡 박아달라 했더니 아무 말도 없이 튼튼히 박아 주는 것이었다. 마침 신고 갔던 구두도 닦아 주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보통 때 그는 나의 구두를 광내주고도 일체 수수료를 한사코 사양해 왔다. 그러나 오늘은 짐짓 내 마음이 꼭 수수료를 주고 싶어서 지갑을 꺼내자 그는 목사님과 자기 사이엔 돈이 오고가면 안 되는 관계라고 극구 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지갑을 다시 주어 넣었다. 멍하니 좁은 구두방 박스 안에 앉아 있노라니 어떤 청년이 구두가 발을 조이며 불편하니 구두의 좌우를 좀 넓혀 달라는 주문을 해 왔다. 그러면서 이 청년은 그게 아버지 구두인데 아버지
“몇 주 전에 산 복권표인데 알아봐 주세요”라고 했다. 기계에 넣어 확인해 보더니 5,000원으로 5장 구입한대로 5,000원 본전을 내어주었다. 부산서 개척교회 시절 교회당을 지하와 1층 올리고 2층과 준3층을 증축할 돈이 없어서 ‘에라 로또나 한번 걸리면 되겠지!’하고 부산역에서 만원 복권을 샀으나 허탕 친 일이 40년 전 그때 있었는데 ‘이번에는 본전이 되었으니 그래 다음에는 세 번째로 시도해 볼까?’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요사이 매스컴의 주제가 돈으로 흐르는 세상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예부터 세상은 ‘돈, 돈, 돈!’ 그놈의 돈이 무엇이길래! 생각하다가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제일이다’는 세상의 흐름을 보았고, 보고, 또 그런 세상으로 흘러갈 것이리라. 세계 선교를 하려면 돈에 부대낄 때가 한두 번이었던가? 지난 10월 19일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길거리와 숲 그늘밑에 모일 2만명 전도집회도 주강사로 못간 세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돈 2,000만 원 준비였다. 기름이 있어야 차가 달리는 것을 이제야 절실히 깨닫게 되다니!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전10:19)는 솔로몬의 청지기 정신을 모른 채 남에게와 구령선교에 퍼주고 이제껏…
현대의학과 자연의학의 세계는 아주 다르다. 우선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치료법도 전혀 판이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의학(대체의학, alternative medicine)의 세계에서는 질병의 원인이 단순한 만큼 그에 대한 치료법도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의학의 질병관이 너무나 단순하며 때로는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이며 비과학적이라고 현대의학에서는 질타할 수도 있다. 이 비과학적이라는 말에 오늘날 전 세계 자연의학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막스 거슨(Max B. Gerson) 박사는 차라리 자신은 비과학적인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다. 막스 거슨이 젊었을 때의 전문분야는 내과와 신경과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심한 편두통을 앓아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에 대한 치료법을 아는 의사가 없었다. 많은 선배 의사들에게 편두통에 대한 치료법을 물어 보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을 감내하면서 생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편두통에 대한 치료법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결심하고서 틈이 나는 대로 옛 사람들이 쓴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저는 “모태 신앙인”이었습니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못 해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30년 넘게 큰 어려움이 없이 평탄하게 살아오면서 믿음 좋으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신앙도 뜨겁지 못하고 영혼에 대한 간절함도 느끼지 못한 채 안일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제가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 것은 서울로 이사 오기 전에 다녔던 수원교회 조충구 목사님을 만나고부터였습니다. 목사님은 매주일 오후 교인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나가셨는데 그 때 웬만한 신앙인은 모두 나가는 터라 저 또한 그냥 따라 나갔습니다. 그동안 아는 사람에게 교회에 나오라는 말은 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용기를 내게 되었고, 3주차 나갈 때는 간절히 기도하고 나가서 처음으로 나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그 사람이 뜨겁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2년 이상 주일 노방전도를 나가며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을 때, 학교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전도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3주 과정인 전도훈련에 참가했습니다. 그 전도훈련은 1주일에 한번 교육받고, 그 방법대로 그 주간에 1명이상에게
목련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품고서 꽃빛을 빚는다 바람결에 쌓인 하얀 눈송이를 고르며 겨우내 뽀얗게 꽃빛을 고른다 찬 바람 밀치고 하얀 심지로 봄을 켜는 목련빛에 눈이 시리다 시인은 대전 선한교회 신원섭 목사의 아내로 동역하며, 선한 어머니로 짙푸른 계절을 산다. 목산문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태복음 5, 6, 7장을 통칭 산상수훈이라 칭한다. 이 제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리신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훈이라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인 듯해서 통칭하던 수훈이라 하지 않고 장수를 말하게 된 것이다. 평상시에는 필자도 산상수훈으로 부담없이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39~41) 나눠 줘야 한다는 교훈에 이르러서는 선뜻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고 장영희 씨는 그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가 옆 좌석에 있는 사람들과 각인이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 나눠 주기를 해 보라고 해서 겪은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서로 나눌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 몸으로 갔던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주머니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다. 구원은 마치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회개와 믿음의 양면성 가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회개의 촉구’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얼굴이 뻔뻔하고, 이마가 굳은 백성이라고 외쳤다. 목이 곧은 것은 교만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얼굴이 뻔뻔하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마가 굳다는 것은 회개하는 지혜가 없이 자기의 소견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선지자였던 침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외쳤고,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은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
웬 세상에 별일이 다 있는 것 같다. 열대 사막에서 난로를 팔고 추운 지방에서 냉장고를 팔며 사하라 사막에서 스키기구를 팔아서 돈 버는 기업 세상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상술(商術)이라 하고 마케팅 정신이라 한다. 마켓 3.0시대의 브랜드 관리자는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브랜드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러고 보면 브랜드 관리자가 지닌 고유한 상품은 없다. 오직 소비자의 욕구에 따라 유동하는 제품만 그 때 그 곳에 출현했다가 어느 사이에 또 사라진다. 묻노니 복음도 상품 복음인가? 성도는 복음의 소비자인가? 성도의 욕구와 기호에 따라 복음이 바꿔져야 하는가? 복음도 일종의 브랜드란 이름을 붙여야 잘 팔리는가? 우선 보기에 그런 것 같다. 기독교 방송에서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브랜드 설교 경연대회같이 느껴지는 서글픔이 있다. 설교자는 복음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한 선포자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선포자다. 병원에서 치료행위도 있지만 반드시 영안실이 있다. 비행기를 타도 탈출구와 탈출방법부터 가르친다. 달리는 버스 벽에도 파괴 망치가 비치되어 있으니 만약의 경우 깨고 탈출하라는 경고문이 있다. 그런데 교회에도 탈
약 400년 전인 1592년에 영국에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목사님은 위의 표어를 들고 침례교회 목사로서 처음으로 선교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그분은 목사님들의 모임 중에서 “여러 목사님들이여, 마태복음 28장에 있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도전했습니다. 그 때 나이든 칼빈주의 목사님께서 “젊은 목사, 앉으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전도를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과 내가 없이도 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세계 지도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는 여러 나라에 가서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되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소명을 위해서 외국선교회를 조직했으며 그 선교회에 의해서 그는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선교비를 모았으며 또 그의 선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캐리 선교사는 인도의 칼캇타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7년 만에 성경을 번역하여 반포함으로 그해 3,000명의 결신자를 보았습니다. 덴버(Denver) 병원의 보조의사로 일하던 사람이 럭키 산맥의 기슭에서 혼자 낚시를 하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산…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전도사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사람 사는 집에 성경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 주려고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로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어찌 저렇게 박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교회에 나간 지 얼마 안된 어린 나였지만 믿는 사람으로 너무 야박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은 의문(?), 다음엔 놀람(!), 그리고 결론(.)으로 이단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후 “파수대”라는 책자를 가지고 집집마다 골라 교인 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이단”이니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고 내어 쫓으라고 설교 중에 또 크게 말씀하셨는데 그때가 1951년 8월 3일 처음 교회에 나간지 한 달쯤 지났으니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후였으리라. “이단”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를 이(異) 끝 단(端) 자로 처음은 신앙이 같은데 끝이 다르게 변질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1:10~11) 저동교회에 같이 나가는 동창생 이진호와 김성화 등과 얘기도 나누
현대의학이 오늘날의 정통 치료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불과 20세기 초였으며 그때까지는 모든 나라에서 대체의학(代替醫學, alternative medicine)이라고 불리는 자연 치료법, 즉 자연의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날과 같이 현대의학이 절대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기초는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6)가 세균을 발견하여 모든 질병의 원인이 세균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학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파스퇴르의 주장이 아무리 훌륭하고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막강한 세력이나 힘 있는 국가의 지원이 없이는 그러한 논리를 세계 모든 대학과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세계 모든 병원에 그토록 신속하게 파고 들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균이 모든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주장을 폈던 파스퇴르 자신도 주위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게 되자 재고를 하게 되었으며 죽기 전에는 결국 자신의 논리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질병의 원인은 세균의 출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에는 반드시 세균의 박멸이
새로운 미래를 위해 총회 규약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교단 안팎에서 점차 커지고 있다. 최근 총회규약 수개정 공청회가 침례신학대학교 페트라홀에서 열렸다. 지난 4월 10일 열린 공청회는 규약 개정에 관심 있는 총회 가입교회 대의원들의 참여 열기로 뜨거웠다. 이날 공청회 참석자들은 규약이 현재 우리교단의 현실과 맞지 않는 곳이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요구가 커지는 시점에서 모여서인지 개정에 대해 전체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로 진행됐다. 규약 개정의 필요성·방향·주요 내용 등을 다룬 공청회는 총회 규약 수개정안과 관련해 6년 만에 열린 공개 토론의 장이었다. 이날 진행은 총회 개정안에 대한 규약개정위원의 설명에 이어 참석자들의 질문 및 토론 등으로 이뤄졌다. 총회는 지속적으로 대의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충분히 수렴한 뒤, 규약 개정안을 보완해 임시총회에서 상정안건으로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81년 총회 규약이 개정된 이후 37년 동안 부분적인 수개정만 이뤄진 상황에서 이번 총회 규약 개정은 변화하는 총회와 지방회, 그리고 개 교회 현실에 맞도록 개정 방안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우리교단 총회규약 수개정 절차와 관련해 총회규약 부칙 제29조 1
지난 4월 3일 충남인권조례 폐지안이 다시 가결됐다. 동성애를 옹호·조장할 우려가 있다며 자유한국당 도의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뜻을 모았다.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인권조례 폐지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로 향후 타 지방자치단체에 어떠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지 교회입장에서 그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충남지역 여당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반발여론이 형성되고 충남도가 대법원에 제소하는 문제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승전가를 부르기는 이른 시점이다. 지금은 힘겹게 막아냈지만 언젠가 동성혼이 합법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미국이 우여곡절 끝에 동성혼을 합법화시켰다. 지난해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20대의 동성혼 합법화 찬성 수치는 66%에 달한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나라 또한 동성혼 합법화의 그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동성애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한국교회의 방식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해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가 동성애축제를 앞두고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자신들이 그나마 맞불집회도 열고 반대 목소리도 내니 서울시가 부담을 느끼고 서울광장 사용 허가를 망설이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4월 1일 부활주일에 교회마다 지역마다 세대마다 또는 교파 간 연합하여 드린 예배에서 말씀과 찬양, 기도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다. 사순절과 부활주일을 거룩하게 지킨 한국교회와 성도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지상명령을 내렸다. 지상명령은 복음을 온 세상에 편만하게 전파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서있는 모든 곳이 사역지이고 내 삶의 현장이 바로 전도(선교)지가 돼야 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복음 전파는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통한 것일 수밖에 없다.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365일 지상명령에 충성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교제를 회복한 성도들은 교회의 부흥을 꾸준히 인도해 왔다.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뤄져 왔다. 기독교 월간지인 ‘목회와신학’(4월호)은 최근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만 19세 이상 국내 기독교인 500명과 목회자 300명 등 800명을 대상으로 신앙실태에 대한 온라인
주님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다시사신 부활의 새아침이 밝아왔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주간 등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승리의 부활 아침을 소망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3~14)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인에게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강조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더욱 확신에 갖고 복음 전파와 주님의 사랑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 전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부활의 참된 기쁨을 찾아보기 힘들다. “부흥이 안된다” “성장이 어렵다” “교회 인원이 점점 줄어든다” 등 교회의 현실에 대한 위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프로그램의 부재를 탓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예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교회의 큰 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은 다 지난 네오막시즘에 대한 두려움이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다. 내용을 보면 다양성을 중시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름은 어찌됐든 다르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의 위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은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 목사 종교인 과세에 관한 글을 써볼 생각이 없나?”고 전화를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많이 망설였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몰수당하시면서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시고 짐승처럼 울부짖으셨다던 조부와 또 공직에 계시면서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 때문에 파산했던 선친의 아픈 추억과 조부의 유언으로 목사가 되셨던 선친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보니 세금을 내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세금을 내지 않는 다는 것이 무슨 특혜 같지만 성장과정에서 정상적인 국민의 권리를 별로 누리지 못한 절반만의 국민이었다. 대부분 목사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두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다. 첫째, 국가가 관습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던 것이고 둘째, 개척교회나 농어촌 교회의 열악한 현실은 세금 낼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목회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과세를 면제해 준다는 법적 제도적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우리민족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이래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 다만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쓰면서 불교에 조세를 부과한 예는 있지만 조선의 억불정책에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