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지식)은 필요 없어! 그냥 믿으면 돼! 머리로 따지지 말고 느끼는 대로 믿어!”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생각을 멈추라, 연구(공부)를 멈추라, 질문을 멈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내용의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매우 지성적이셨습니다. 율법을 정확히 이해하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논리로 꺾으셨고,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지식과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깨달아라”(신 4:39)
“주의 율법을 묵상하라”(시 1:2)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라”(빌 1:9~10)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
그렇다면 지식과 삶(행함)이 균형을 이루는 신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반, 실천을 반으로 섞는 절충적인 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지식적으로 바르게 알고, 그 알게 된 그 지식의 토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삶이 균형 잡힌 바른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삶은 지식(이해와 깨달음)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올바른 이해와 지식 없이 올바른 신앙과 삶이 나올 수 없고, 올바른 행위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삶(신앙)’은 반드시 ‘올바른 이해와 참된 지식(교리, 신학)’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올바르지 않은 이해와 지식(교리, 신학)’에서는 반드시 ‘올바르지 않은 신앙과 삶’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행위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바울(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올바른 지식을 따른’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결코 올바른 지식의 터 위에 있지 못했기에 헛된 열심, 헛된 삶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바른 설명을 듣고, 올바른 지식(진리, 정통신학과 교리)을 배우며, 깊이 있는 이해를 쌓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성숙한 신앙과 올바른 삶이 흘러나옵니다.
반지성주의 : 맹신
한 외국 선교사님이 한국 기독교를 보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 꺼풀을 벗겨보면 불교가 나온다. 한 꺼풀 더 벗겨보면 그 속엔 유교가 있다. 그리고 한 꺼풀 더 벗겨보면 샤머니즘이 나온다.’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중에 아직 기독교 이해가 부족해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를 비롯한 토착 기독교의 맹점입니다. 요즘은 한국에도 훌륭하신 신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옆 나라 일본은 채 1%도 되지 않는 기독교이지만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많이 배출했습니다.
한국 민족은 뜨거움과 열심을 가진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뜨거움과 열정, 헌신과 충성, 희생 등이 한국 기독교의 특성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폭발적 부흥이 일어나고, 신자의 수는 25%에 달하는 천만이 넘었으며, 수없이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도 교회 개척에는 한국 선교사님들이 제일입니다. 저 역시 선교의 경험이 있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적 열심은 있는데, 신학적 토대는 부족했습니다. 머리보다는 가슴, 냉철함보다는 뜨거움, 지성보다는 행함을 강조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영차 영차해서 열심히 경제를 비롯한 모든 국가적 부흥과 교회 부흥을 이뤘습니다. 교육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열심’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건강하고 튼튼한 신학적 토대가 없는 잘못된 열심들이 난무하게 됐고, 신앙이 좋다는 것을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다’라고 말하며 ‘반지성주의적인 행함’의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주지주의나 지성주의의 위험은 늘 있기에 행동하는 열심을 강조하는 그런 시기가 분명 필요했겠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바른 열심’을 따졌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침으로 맹신에 빠진, 윗글의 선교사님이 본 현재의 기독교 상황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 듯하나 기독교가 아닌 ‘이상한 한국 기독교=유사 기독교’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한국뿐이 아니라 모든 기독 신앙이 시작되는 곳의 위험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탄은 교회로 하여금 진리(지식)을 떠나게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고린도후서 4장 3~4절입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열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비 복음, 비진리 체계를 조금씩, 야금야금 정통교리를 가진 정통 교단에도 서서히, 그러나 깊숙이 뿌리내리게 함으로 기독교를 변질시킵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이름이 자랑 되어지고, 인간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만듭니다. 인간을 주목하게 되고, 인간이 영광을 받는 비진리의 체계로 교묘하게 속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체계와 교회의 조직과 시스템 자체가 인간을 높이고, 자랑하며, 인간의 이름을 더욱 드러내는 형태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비교, 경쟁 시스템과 체계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죽은 정통입니다. 관례와 관습, 전통이 되어있어서 그것이 죄요, 우상숭배요, 인간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잘못되어 있음에도 그런 것들이 인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 4장 19절입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사탄과 교회의 궁극적 싸움은 영광의 싸움입니다. 복음이 가리워지고 진리를 떠나게 되니 교회는 세상 사랑과 세상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도둑질하고, 신자들의 삶은 부정과 부패, 음란과 거짓,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삶으로 떨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있게 하기 위한 사탄의 전략입니다. 이것이 중세와 현대 유럽과 미국 기독교(자유주의 신학)가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조강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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