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미세 영역에 ‘수백 층짜리 초고층 아파트’를 세우는 작업과도 같다. 웨이퍼(원판)라는 빈 땅 위에 산화막을 입히고, 빛으로 회로를 새기고, 깎아내고, 불순물을 이온화하여 주입하고, 다시 씻어내는 과정이 반복된다. 한 층이 완성될 때마다 같은 작업이 다시 이어진다.
이렇게 만든 최첨단 반도체는 회로를 수십, 수백 층까지 쌓아 올린다. 그래서 기본적인 공정들이 끝없이 반복되며, 전체 제조 과정은 수천 단계에 이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가장 중요한 작업들이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려하게 완성된 결과물 뒤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시작’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당시에는 작고 미약해 보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 거대한 역사의 출발점이 됐던 사건들이다. 1899년 피터스(Peters)의 제주 방문 역시 그렇다.
19세기 말 제주도는 지금과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바다로 고립된 섬, 중앙 권력에서도 멀리 떨어진 변방, 그리고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말씀의 빛이 본격적으로 스며들지 않은 땅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제주는 낯설고 험한 섬이었지만, 피터스의 눈에는 달랐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선교지’를 봤다.
피터스의 제주 탐방은 단순한 여행이나 민속적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선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 사회 안에서도 가장 고립된 공간 가운데 하나였던 제주를 바라보며, 아직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지지 않은 “영적 변방”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 인식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체류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복음서를 나눠줬고, 성경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낯선 외국인이 건네준 작은 책 한 권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조용하게, 작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그 장면의 의미를 안다. 그가 남긴 성경과 복음의 흔적이 훗날 제주 복음화의 씨앗이 됐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피터스의 제주 방문은 단순한 답사가 아니라, 제주 땅에 복음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선교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피터스가 제주를 단순히 낯선 섬으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주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 경제적 현실, 그리고 종교적 분위기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의 기록에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던 제주 민중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동시에 중앙 권력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되어 온 지역의 현실도 드러난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19세기 말 제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1차 사료가 된다. 당시 제주를 직접 방문한 외국인의 기록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피터스의 보고서는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크다.
특히 그의 활동은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당시 선교는 교회를 세우는 일 이전에 먼저 성경을 보급하고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피터스 역시 권서(勸書) 사역자로서 단순히 책을 판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들고 복음이 닿지 않은 지역을 찾아갔고, 말씀을 통해 새로운 선교의 가능성을 열어 갔다.
다시 말해 권서 사역은 단순한 문서 보급 활동이 아니라, 미전도 지역을 탐색하고 복음의 토양을 준비하는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제주 방문은 바로 이러한 권서 사역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피터스의 제주 탐방은 한국 선교사 연구의 지평을 넓혀 준다. 기존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서울, 평양, 부산과 같은 본토 중심의 선교 역사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제주와 같은 섬 지역의 복음 전래 과정은 상대적으로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피터스의 기록은 복음이 한반도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어떻게 확장됐는지를 보여주며, 한국 초기 선교가 단순한 도시 중심 운동이 아니라 변방과 경계 지역까지 향하고 있었음을 증언한다.
무엇보다 피터스의 제주 방문은 “한 권의 성경이 한 지역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성경은 단지 종교 서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의 씨앗이었고, 아직 이름 없이 남겨진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의 표현이었다. 제주 땅에 처음 놓인 그 성경 한 권은 훗날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가 드려지고, 복음이 확장되는 긴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반도체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공정에서 결정되듯, 복음의 역사 역시 이름 없이 뿌려진 말씀의 씨앗 위에서 시작된다. 1899년 피터스의 제주 방문은 당시에는 작은 사건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순종을 통해 한 지역의 영적 지형을 바꾸기 시작하셨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목회 역시 그렇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설교, 한 사람을 향한 심방, 조용한 전도와 말씀의 씨앗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공정’을 통해 내일의 교회를 준비하고 계신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교회는 질문 앞에 선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제주’를 향해, 누가 다시 성경을 들고 걸어갈 것인가?
백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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