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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세대 (1)(창세기 22장 20절 ~ 25장 18절)

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47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창 22:20)

 

브엘세바로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삭의 결혼이었을 겁니다. 미리 정해 놓은 결혼 상대자가 없었으니 신부가 될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한 군데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온 아브라함이었기에 신붓감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웃한 부족은 문화도 다르고 종교 차이도 커서 알아보고 싶지 않았을 테고, 집안 식구 가운데 이삭의 배필을 찾으면 좋겠는데, 고향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됐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롯 가족이 몰락하고 나니 그마저도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때 뜻하지 않게 동생 나홀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 11장 족보를 살펴보면 데라에게 아브라함, 나홀, 하란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하란은 일찍 죽었고 데라가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과 더불어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왔다는 기록이 있을 뿐 나홀의 행적은 따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뒤에도 나홀은 여전히 고향에 남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제야 근황을 알게 된 것이죠.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나홀의 자녀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을 겁니다. 오래전, 헤어진 동생 소식도 반가웠지만, 동생 자녀 가운데 이삭의 배필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결혼 준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진행은 조금 미뤄야 했습니다.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었거든요.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창 23:2)

 

백이십칠 세가 된 사라가 헤브론에서 사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오른 때의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난 시점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때가 구십 세였으니 서른여덟 살 어른으로 장성한 이삭이 임종을 지켰을 텐데, 자식을 낳지 못해 겪은 지난날의 고통을 어느 정도 보상받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죽은 장소가 브엘세바가 아니라 헤브론인 걸 보면 아브라함이 북쪽 헤브론으로 이주한 뒤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다시 헤브론으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네요. 죽음을 앞둔 사라가 헤브론에 가기를 원해서 일부러 올라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참으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헤브론에 이르렀을 때가 창세기 13장이었죠. 애굽에서 나온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진 뒤,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시며 그 땅을 모두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장소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나무 수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며 애굽 이후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헤브론에 살면서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기도 했고,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소돔 멸망을 목격한 안타까운 기억도 있었죠.


하나님을 대면한 자리에서 사라가 웃었던 장소도 헤브론이었으니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에게 헤브론은 대단히 의미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란을 떠난 뒤 처음 정착했던 세겜을 제외하면 그들의 여정에서 헤브론이 아닌 곳은 애굽과 그랄(브엘세바)인데, 두 곳 모두 사라가 남의 아내가 될 뻔한 수모를 겪었으니 헤브론이야말로 두 사람에게 안전과 행복을 준 유일한 땅이었죠. 이곳에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얻은 사라는 또 다른 선물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

 

당시 헤브론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부족은 헷 족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헤브론에서 장사 지내고자 마음먹었음을 알게 된 헷 족속이 그에게 매장지를 제공할 의사를 보였죠. 23장에 기록된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아브라함을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는데, 과거 헤브론에서 살았던 시절 아브라함이 가졌던 영향력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들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자신이 합법적으로 매장지를 구매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헷 족속이 매장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거듭 권했는데도 값을 치르겠다고 고집해 마침내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소유한 밭과 그 밭에 있는 굴을 은 사백 세겔을 주고 구매하게 되었죠.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창 23:17~18)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합법적으로 땅을 가지게 됐고 그곳에 사라를 장사함은 물론, 후손 대대로 사용할 공식 가족 묘실을 가지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시작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헤브론 일대를 근거지로 삼게 되는데요, 창세기를 읽다 보면 이삭과 야곱이 헤브론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 35:27, 37:1). 사라는 죽은 뒤에도 가족이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줬고, 수명이 다한 아브라함과 후손이 헤브론의 그녀 품에 안식하게 됐죠. 어머니의 땅 헤브론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목초지이요 또 립나와 그 목초지와(수 21:13)

 

이후 헤브론은 아브라함 후손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호수아 21장은 이곳이 율법에 따른 도피성으로 지정됐음을 알려 주는데요, 도피성은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받기 전까지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지정된 보호구역이었습니다(민 35:22~28). 살인죄를 죽음으로 갚게 하는 또 다른 율법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살인에 연루된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도 없이 즉결 처형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지정된 곳이었죠. 뭔가 큰일을 저지르고 엄마에게 달려가는 아이처럼 무고한 사람을 품고 보호하는 땅이 도피성 헤브론이었습니다. 역사는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곳도 헤브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훗날 민족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예루살렘이 열매 맺고 성취되는 땅이었다면, 사라가 장사된 헤브론은 잉태하고 시작되는 땅이었죠.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왕까지 헤브론이라는 엄마 품에서 보호되고 생명을 얻었는데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열국의 어머니 사라였습니다. 고통받던 한 여인의 삶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마무리됐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은혜네요. 물려주고 은퇴한 셈이죠.

유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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