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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침례교회 독일 아웃리치 동행기(2)

베를린침례교회 시설 보수•종교개혁지 탐방… 끝나지 않는 복음행전

 

땀방울로 환하게 밝힌 주의 성전
베를린에서의 네 번째 날은 교회 보수를 하는 날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베를린침례교회는 지어진 지 꽤나 오래된 건물로 손을 많이 필요로 했다.


아웃리치 팀은 베를린침례교회 청년들과 함께 교회 내부 페인트칠을 했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대부분 페인트칠을 해본 적이 없었고, 계단 쪽은 어두워 제대로 칠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지난 사흘간 친해진 양 교회의 청년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힘든 표정 하나 없이 웃음소리 가득 서로를 의지하며 새로운 베를린침례교회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아웃리치 팀 최연장자인 박정환 집사는 본당 천장에 달린 조명을 LED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조명이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작업이었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조명이다 보니 전등을 갈아 끼우는 것도 버거웠고 하나를 끼우면 다른 하나의 불이 꺼지기도 하는 등 복잡한 작업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새로운 빛이 예배당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모두 녹초가 됐을 상황인데도 양 교회의 청년들은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쉬웠던 모양이다. 밤늦도록 마피아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그들은 이제는 어엿한 한 가족으로 변해 있었다.

 


종교개혁의 숨결을 따라
베를린침례교회에서의 사역이 모두 마무리된 후 남은 이틀간은 체코와 라이프치히, 비텐베르크를 둘러보며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먼저 체코에서는 얀 후스의 흔적을 쫓았다. 장원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비텐베르크로 갈 수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얀 후스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먼저 체코로 인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과 프라하 성, 성 비투스 대성당, 카를교 등을 지나며 왜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오는지 이해하게 됐다.


얀 후스의 흔적은 베들레헴 채플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16세기에 활동한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활동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격인 인물인 얀 후스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신학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다. 당대 가톨릭 교회의 문제와 부패를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한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화형당했지만, 그의 뜻은 훗날 종교개혁의 초석을 마련했다. 장원준 목사는 “얀 후스는 유언으로 ‘오늘 당신들은 1마리의 거위(고대 체코어로 ‘후스’)를 태우지만, 당신들이 태우지 못할 백조 1마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유언은 마르틴 루터의 출현으로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베들레헴 채플 2층 난간에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왕비가 얀 후스의 설교를 몰래 들었던 장소라고 하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다음날은 라이프치히와 비텐베르크를 방문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27년 동안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며 섬겼던 성 토마스 교회를 찾아갔다. 바흐와 마르틴 루터는 시간적으로 약 2세기라는 간격이 존재하지만, 독일 루터교 신앙과 음악사에서 영적으로 깊게 연결된 인물이다. 바흐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과 신학을 자신의 음악을 통해 집대성한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비텐베르크에서 먼저 만난 것은 마르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그녀는 본래 귀족 출신이자 시토회 수녀였지만, 루터가 그녀를 비롯한 10명의 수녀를 수도원에서 탈출시켜 환속하게 됐다. 그 후 다른 수녀들이 짝을 만나 떠날 때 그녀는 “루터가 상대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고집을 피웠고 결국 루터와 결혼해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고 한다.

 


장원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카타리나는 루터가 잘못된 길로 빠질 때면 “우리가 알던 루터는 죽었다”며 강하게 비판해 루터를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내조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올바른 목사와 사모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시이지 않을까 싶은 일화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시립교회와 마르틴 루터의 95개 반박문을 청동 부조로 새겨 놓은 궁정교회를 방문했다. 시립교회 바로 옆에 조그마한 예배당에서는 어떤 팀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영어로 부르고 있었다. 이 찬양은 마르틴 루터가 작사·작곡한 곳으로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인들에게 큰 용기를 줘 “개혁의 전투 찬가”로 불리기도 한다.

 


열린 결말로 이어지는 복음의 전진
모든 일정이 끝나고 베를린을 떠나는 마지막 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기념공원 등 독일 시내를 짧게나마 관광한 후 헤어짐의 시간을 맞이했다. 교회 문을 나서며 양 교회 청년들은 눈물을 보이며 너무나도 짧은 시간을 원망했다. 그렇다고 아웃리치 팀의 사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웃리치 팀장을 맡은 최지영 자매는 하루 더 베를린에 머물며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어떻게 독일 아웃리치를 함께할 마음을 품었느냐는 질문에 “안 갈 핑계가 없었다”고 답했다. 다른 동역자들은 각각 불가피한 사정으로 갈 수 없었지만 마치 자신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이라도 하셨던 것처럼 환경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모든 것이 충족되게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특히 항공권 티켓팅이 한 번 실패한 후 독일에 거주하고 있던 친구가 생각났고, 하루를 더 머물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동시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최지영 자매의 간증은 마치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처럼 아웃리치 또한 모든 일정은 끝났지만 복음의 전진은 멈추지 않음을 떠올리게 했다.

독일 베를린=범영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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