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조선의 왕이 적색 곤룡포를 입은 것은 아니다. 이성계의 어진을 보면 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이는 당시 명나라가 조선을 완전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임시로 고려를 다스리는 사람)’라는 직책만 내렸던 굴욕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후 태종 1년(1401) 정식 책봉이 이뤄지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세종실록”에서 세종 26년(1444)에 ‘대홍직금곤룡포’가 등장한다. ‘홍직(紅織)’은 적색으로 짰다는 뜻이다. 이 무렵부터 적색 곤룡포가 제도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왜 고종(조선 26대)은 황색 곤룡포를 입게 됐을까? 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승리하게 됐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고종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황색 곤룡포의 착용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는 외교 질서의 변화와 함께 상징 체계도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권력은 색으로도 드러난다. 그러나 색이 바뀌었다고 권력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곤룡포는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단종의 비극이 보여주듯 권력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조선의 왕이 입던 곤룡포는 단순한 왕의 옷이 아니었다. 명나라로부터 하사를 받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외교 질서 속의 복식이었다. 왕의 옷에는 국제 관계와 왕권의 정통성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왕세자의 곤룡포는 어땠을까? 사정은 조금 달랐다. 왕처럼 별도로 하사된 제도가 아니라, 왕세자 면복을 하사받는 과정에 맞추어 조선이 자체적으로 마련해 시행한 복식이었다. 처음부터 완성된 제도로 정착했다기보다, 오랜 시행착오 속에서 정리되어 간 관례에 가까웠다.
문제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는 왕세자가 오래 유지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세자가 일찍 즉위하거나 요절하면서 제도를 충분히 다듬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결과 왕세자복은 늘 논쟁의 대상이 됐다. 세자가 어디까지 왕과 같은 복식을 착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왕권의 위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왕세자복을 곤룡포로 하자는 논의는 세종 말년,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던 문종 시기에 본격화됐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왕세자의 곤룡포를 하사했지만, 실제로 조선에 도착한 것은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도는 논의됐으나 현실은 늘 한 박자 늦었다.
초기 논쟁의 핵심은 익선관을 써도 되는지, 가슴에 용 문양 흉배를 달 수 있는지였다. 이는 결국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는가?”의 문제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단종은 익선관과 용흉배를 착용한 최초의 왕세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복식은 곧 지위의 선언이었다.
색깔 문제도 쉽지 않았다. 기록을 종합하면 왕세자복은 도입 초기부터 아청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한때 녹색을 시도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중종 대 기록에도 이전부터 아청색을 입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예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혼란이 일어났다. 선조 이전 마지막 왕세자였던 인종이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흑색이었는지 홍색이었는지 논쟁이 이어졌지만, 결국 왕과 세자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아청색으로 정리됐다.
왕세자복의 색이 명확히 확인되는 기록은 조선 18대 왕인 현종 즉위년(1659)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왕세자복은 비교적 안정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아청색 곤룡포는 단순한 색채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과 세자의 위계를 분명히 하면서도 왕권 질서를 지키려는 조선의 고민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다. 옷 한 벌에도 정치가 스며 있다.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색깔 하나에도 시대의 질서와 고민이 담겨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편, 곤룡포는 그 상징성 때문에 역사적 사실보다 과장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신숙주(영의정) 일화다. 집현전에서 숙직하다 잠든 신숙주에게 세종이 친히 곤룡포를 벗어 덮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전인 연려실기술(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조선 역사서)을 보면 사실은 다르다. 그 옷은 곤룡포가 아니라 ‘담비 갖옷(모피)’이었다. 또한 세종이 직접 덮어준 것이 아니라 내시에게 덮어주라고 명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피’는 ‘곤룡포’로 바뀌었고, ‘내시의 전달’은 ‘임금의 직접 행동’으로 바뀌었다. 왕의 인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과정에서 상징이 덧붙여진 것이다.
대중문화에서는 이런 상징이 더 극적으로 표현된다. 한때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이묘환태자’ 편이 그 예다. 북송(송나라)의 황제 송인종은 자신이 생모를 돌보지 못한 죄를 어떻게 벌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포청천은 곤장 50대에 해당한다고 답한다. 황제가 스스로 벌을 받으려 하자, 포청천의 참모 공손책(공손선생)은 “황제의 곤룡포는 곧 황제의 몸과 같으니, 곤룡포가 대신 벌을 받을 수 있다”라는 기발한 묘안을 제시한다. 결국 황제 대신 곤룡포가 곤장을 맞는 기괴한 장면이 연출된다. 이처럼 곤룡포는 단순한 옷을 넘어, 왕과 동일시되는 상징으로 그려진다.
곤룡포만 서술했다고 조선 왕의 의복에는 ‘곤룡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곤룡포를 비롯해 하례(임금이 공식적으로 축하 인사를 받을 때)를 받을 때의 ‘원유관복’, 제례 혹은 기타 행사시 착용하는 ‘면복’까지 크게 보았을 때 총 3가지로 조선왕의 의복이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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