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C. 펜윅 서거 90주년 기념 콘퍼런스 개최

  • 등록 2026.04.29 11: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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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 침례교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한 말콤 C. 펜윅 선교사의 숭고한 헌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115차 총회(총회장 최인수 목사)와 한국침례신학대학교(총장 피영민)는 지난 4월 14일 교내 아가페홀에서 “말콤 C. 펜윅 서거 90주년 기념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말콤 펜윅의 신학과 동아기독교(대한기독교회)”란 주제로 열린 이번 콘퍼런스는 총회와 한국침례신학대학교(피영민 총장)가 주최하고 (사)한국침례회 역사신학회(이사장 임공열 목사)와 침례교신학연구소(소장 김태식 교수) 주관으로 열렸다. 발제자는 한국침신대 김태식 박사와 한국침신대 신대원 박영진, 이경희 박사, 오지원 박사가 나섰다.


침례교 정체성을 묻다
식전 행사에서 환영사에 나선 피영민 총장(한국침신대)은 타 교단 학자들이 주도하는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침례교의 역사가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포문을 열었다. 피 총장은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다”며 “우리 스스로 침례교의 역사를 연구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고 역사 연구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추모사를 전한 78대 총회장 김인환 목사는 펜윅 선교사가 남긴 “세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물들지 말라. 내 무덤에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장(平葬)으로 하라”란 마지막 유언에 주목했다. 일제강점기 치하, 다수의 교회가 생존을 핑계로 신사참배와 인본주의에 무릎 꿇고 있을 때 펜윅은 철저한 비움과 순수성을 요구했다는 것이 김인환 목사의 설명이다. 김 목사는 “복음의 역동성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 이름과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분”이라며 “다수의 힘과 팽창주의에 함몰된 오늘날, 펜윅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회 총무 김일엽 목사는 “이번 콘퍼런스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자리가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해 세워진 우리 교단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묻는 이정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펜윅 선교사뿐만 아니라 교단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선진들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역사로 담아내는 숙제를 교단 차원에서 더욱 치열하게 안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교단 최고(最古)의 기록 ‘달편지’
국가유산의 반열에 서다

본격적인 발제에 나선 김태식 박사는 교단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료인 ‘달편지’의 발굴 과정과 그 학술적 가치를 조명했다. 달편지는 1916년부터 1939년까지 대한기독교회(동아기독교)가 매월 발행한 공식 기관지다. 교단의 행정 보고, 임직 사항, 성경 공부 자료, 총회장의 서신뿐만 아니라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투쟁 기록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 박사는 이 귀중한 사료가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의 극적인 과정을 설명했다. 오랫동안 일부 페이지만 남아있던 달편지는 한 목회자의 은행 금고에 보관돼 오다, 권용도 장로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증을 통해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전체 원본이 학교로 품으로 돌아왔다. 달편지는 문서 선교의 소중한 표본이자,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거대한 유산이다. 현재 학교 측은 달편지의 현대어 번역 및 해제 작업을 진행 중이며, 대전시 심의를 거쳐 국가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조선 민중의 진흙탕 속으로 들어간
영농 선교의 개척자

이경희 박사는 펜윅의 선교 전략을 ‘토착화’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 박사는 당시 조선의 참혹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료들을 제시했다. 권력의 착취와 극심한 빈곤, 질병과 오물로 가득했던 거리의 모습은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낭만적인 시대극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반들의 극심한 수탈에 밀려 화전민이 되거나 간도로 쫓겨나야 했던 민중들에게 조선은 희망이 없는 땅이었다. 펜윅 선교사는 이 깊은 절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원산에 유휴지를 매입해 과수원을 일구고 한국인들에게 영농 기술을 가르쳤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한국인들에게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 박사는 “그의 영농 선교는 선교의 기반 구축이자, 기댈 곳 없는 백성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거룩한 노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토착화 노력은 1906년,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자생적 교단인 ‘대한기독교회’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신사참배 거부, 우연이 아닌 철저한 신학적 결단
콘퍼런스의 학술적 깊이를 더한 것은 박영진 원생(한국침신대 신대원)의 최우수 논문 발표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아기독교의 신사참배 거부가 단순한 민족주의적 항일 운동이 아니라, 펜윅 선교사가 구축한 탄탄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단이었음을 논증했다.


박 원생은 펜윅의 신학을 네 가지 기둥으로 분석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절대적 권위의 ‘성경무오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세주라는 ‘배타적 구원론’, 현실의 고난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 상급을 대망하는 ‘세대주의 종말론’, 그리고 교리가 아닌 삶의 현실로 나타나는 ‘성령 체험’ 신앙이다. 이 네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동아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적 저항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실제로 1942년 원산 사건 당시 일제는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라면 천황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하는가”라고 심문했고, 이종근 감목은 일말의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이 단호한 신앙 고백의 대가로 전국 250개 교회가 폐쇄되고 수많은 지도자가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다. 이 처절한 순교적 저항은 훗날 교단 재건의 가장 강력하고 순결한 원동력이 됐다. 교단 해체 이후에도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했던 성도들은 1940년 임시총회에서 확정했던 ‘동아기독교회’의 이름 아래 해방 후 다시 모여들었다. 박 원생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타 교단들이 해방 이후 친일 청산과 배교 문제로 극심한 내홍과 분열을 겪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일제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고난의 잔을 마셨던 한국 침례교회는 과거사 문제로 인한 일말의 분란이나 갈등 없이 순탄하게 교단을 재건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신학적 순결함은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계승돼 오늘날 교단을 지탱하는 굳건한 뼈대가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교사가 넘어야 할 세 고개, 그리고 완전한 자기 비움
마지막 발제자로 강단에 오른 오지원 박사는 펜윅 선교사가 척박한 조선 땅에서 몸소 체득한 선교의 원리를 ‘세 가지 고개’로 비유해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세 고개는 바로 ‘언어, 관습, 사람’이다. 펜윅은 혹독한 과정을 거쳐 한국어를 습득했고,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조선의 관습을 존중했다. 특히 빌립보서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는 구절을 번역할 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낮아진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위해 ‘항복하셨으니’라고 번역할 만큼 현지 문화에 깊이 다가갔다. 가장 넘기 힘들었던 세 번째 고개는 ‘사람’이었다. 초창기 한국인 동역자를 믿지 못해 모든 사역을 홀로 감당하며 소진(Burnout)을 경험했던 그는, 신명균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 철저한 리더십 위임을 실천하며 교단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냈다.


오 박사는 발제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펜윅의 ‘평장’을 언급했다. 살아서는 철저히 조선 민중의 삶 속으로 녹아들고, 죽어서는 자신의 무덤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던 펜윅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대전=범영수 부장

관리자 기자 bpress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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