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

  • 등록 2024.09.25 11: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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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5


1938년 8월 조선총독부는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우며 신사 규칙을 전면 제정해 다시 참배할 것을 재차 동아기독대(1933~1939)에 강요하자, 김영관 감목은 재차 ‘달편지’를 통해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불복할 것을 전국의 교회에 자차 통고했다. 이에 일제는 동아기독대의 신사참배 반대거부의 확산을 막고자 이들을 제압하려는 방안 마련에 신속하게 착수하는데, 이런 와중에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다.

 

4. 신사참배 거부와 교단폐쇄(1944년)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전출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전시체제 아래서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을 공포했는데, 이는 총력전을 위한 체제로써, 국민적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침례교에도 닥쳤는데, 동아기독대(1933~1939, 현 침례교의 전신)의 김영관 감목(총회장)은 1935년의 ‘달편지’를 통해 전국의 교회에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의 부당성과 당국의 강요에 불복할 것을 당부하는 광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구역에서는 관청 당국에서 황제에게 요배를 하라고 시켰사오나, 그것에 대하여 결코 응할 수 없는 것은 가령 황제님 앞에서 절한다는 것은 옳지만 멀리서 보이지 않는 데서 절하는 것은 헛된 절이며, 곧 절반은 우상의 의미를 가졌으니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 믿는 사람은 못할 일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고 황제께 불경한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믿는 사람이 복음을 어기고 황제께 공경한다면 진정한 복음이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복음을 어기고 자기를 공경하라고 명하실 황제님이라고 저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불경죄라고 책임을 지운다면 그 은혜 베푸시는 대로 핑계 없이 감당하기를 원하며….”(‘달편지’ 1935년 10월 5일)


김영관 감목(총회장)은 일제의 황궁요배 강요는 우상숭배로써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이 복음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결코 응해서는 안 되며, 만일 일제가 이를 불경죄로 다스린다면 기꺼이 감당할 것을 당부했다. 이 같은 감목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간악한 회유와 협박 그리고 혹독한 박해에 못 이겨 신사참배에 응한 일부 동아기독대의 교인들이 있었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교인들에게 국방헌금을 각출하는 지도자(통장)까지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가 발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 제16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함북 경흥군 경흥면 동아기독교대 통장 박석홍은 작년(1937) 11월 6일 관할서에 출두해 ‘우리들은 일본제국 신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감은 없지만, 좌담회 등에 의하여 황군을 우리들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제국 신민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기도를 계속하게 된 것을 깨달아 예하 신자 일동으로부터 국방헌금을 갹출했다.”(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思想彙報’ 제16호, 938년 9월, 7-28)


박석홍은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에서 활동하던 동아기독대 통장(당회(구역) 임원으로 100명의 교인을 통솔하는 직분)으로, 일제가 개최한 시국좌담회 개회 시 황거요배(皇居遙拜)에 대해 “기독교도는 기독(基督) 외에 절대 요배하지 않는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라고 항변할 정도로 신앙이 투철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국좌담회를 통해 그의 생각이 변했고, 이후 자발적으로 담당 경찰서에 출두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다음 자신이 관리하는 경흥구역 교인들에게 국방헌금을 각출해 일제에 바치는 적극성을 보였다. 이는 일제의 기만술에 의한 것이었다.


1938년 8월 조선총독부는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우며 신사 규칙을 전면 제정해 다시 참배할 것을 재차 동아기독대(1933~1939)에 강요하자, 김영관 감목은 재차 ‘달편지’를 통해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불복할 것을 전국의 교회에 자차 통고했다. 이에 일제는 동아기독대의 신사참배 반대거부의 확산을 막고자 이들을 제압하려는 방안 마련에 신속하게 착수하는데, 이런 와중에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다. 함경북도 경흥구역은 앞서 박석홍 통장의 국방헌금 각출에서 알 수 있듯 침례교 내 신사참배문제에 매우 예민했던 대표적인 곳이었다. 탄압을 위한 꼬투리를 찾고 있던 일제는 이를 빌미로 교단의 핵심적 지도자인 김영관 감목·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노재천 목사 등 5인을 원산경찰서로 긴급 소환했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5인의 지도자들이 한결같은 신앙적 답변으로 일관하자, 일제는 그들을 가둔지 3개월 만에 검찰에 송치해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했다. 이후 더 이상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자 김영관 감목과 백남조 총부서기는 3년 집행유예, 다른 3인(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노재천 목사)은 기소유예로 석방했다.


1939년 3월 김영관 감목은 원산에서 긴급하게 교단의 임원회를 소집했다. 이는 감목이 ‘달편지’를 통해 신사참배가 교단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하게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회와 교인들이 이 같은 감목의 처사는 시국을 외면한 조치라며 반발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일부의 반발은 점차 확대됐고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교회와 신자들이 혼란에 빠졌는데, “감목의 지시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시국을 감안해 일제의 지시에 따를 것인가?” 이 같은 문제해결을 위해 교단의 임원들이 논의를 시작했다.


신사참배 거부라는 대전제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과 교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모색에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생겼다. 이로 인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영관 목사는 감목 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이에 임원회는 원로교우회의 확대와 이종덕 목사, 전치규 목사, 김명보, 이상필 등을 위원으로 구성해 교단을 운영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감목 부재에 따른 공백을 최소화하고 교단의 현안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이 역시 신사참배에 대해서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9년 이종덕 목사가 제34차 대화회(총회)의 임시의장이 되어 회무를 진행했는데, 여기서 이종근 목사를 제5대 감목으로 선임했고, “숨님(성령)의 권능이 행하시는 대로 다룬다”라는 신앙적 결단에 따라 일제의 신사참배와 황궁요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교단의 신앙적 입장을 그대로 지켜나가기로 결의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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