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한국 침례교 선교가 시작된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 침례교 역사를 보면, 초창기 자료 부족으로 학문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우리 교단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타 교단 선교사의 기록이나 국가기록원 자료에 동아기독교의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된 사진과 자료는 한국 침례교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史料)로,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이정훈 편집장이 국가기록원에서 최초로 찾아낸 것이다. 1900년에 펜윅 선교사가 선교여행 중 말을 타고 마부와 함께 찍은 사진과 신문기사로, 지속적으로 감추어진 한국 침례교 역사자료를 찾아내고 연구하는 노력들이 필요하겠다.
1930년 8월 7일(목) 중외일보에 실린 “세인의 의혹 받는 동아기독교의 정체, 그 조직은 여하하며 주장은 무엇인가?” 기사를 살펴보면, 1930년도의 동아기독교의 교세, 직책, 교단정체와 교회사업(선교)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 당시 세속교육을 받지 못하게 함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동아기독교를 아주 이상한 종교로 보고, 부여군 임천면 칠산침례교회 장석천 목사를 찾아와 인터뷰하는 내용의 기사를 소개한다. 펜윅 선교사는 1926년 대화회에서 학교교육 폐지령으로 교단 산하 모든 교인들의 자녀를 학교에서 퇴학시키라는 조치를 내렸다.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던 펜윅은 인본주의에 기초한 일제의 세속교육에 대해 거부했다. 그 배경에는 펜윅이 1917년에서 1923년 사이 미국에 체류하면서 세속교육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인 것을 경험하고, 진화론 같은 세속적인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교육폐지를 주장했다고 한다.
교단의 정체성은 교단명에서 대표되는데, 펜윅의 선교방법은 자신의 시행착오에서 경험되어진 토착화된 선교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을 사랑했던 펜윅은 1906년 강경에서 개최된 제1회 대화회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친숙한 “대한기독교회”를 교단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부터 침례교라는 교단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례교 고든 목사로부터 목사안수 받은 펜윅은 타 교단 선교사들로부터 펜윅 선교사가 침례교 목사로 알려졌고 동아기독교 또한 침례교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훗날 펜윅 선교사의 부고를 알리는 “편위익 목사 영면, 선교사업 40여년 반생을 조선에 바쳤다” 신문기사 내용에도 그를 침례교 목사로 언급하고 있다.
세인의 의혹 받는 동아기독교의 정체, 그 조직은 여하하며 주장은 무엇인가?
현대과학문명은(現代科學文明)은 거룩한 신의 아들을 망친다하여 학교교육은 잦은 과학 서류나 기타 서적을 일체 못 보게 한다 하여 세상 사람의 의혹은 날로 깊어가고 일부 식자 계층에서 적지 않은 이론(理論)이 믿는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의 문제는 그 가증한 사실이 한 번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충남부여기자단(忠南扶餘記者團) 창립 당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어 왔는데, 지난 칠월 이십오일 호서기자 동맹서구지부 설치대회(湖西記者 同盟西歐支部 設置大會) 당시에 이 사실이 ○의 만에 듣게 되어 동 지부로부터 조사의원을 파견하여 그 내부를 적나라하게 조사 발표하게 된 바인데 이에 조사의원으로서 전기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 충남 부여군 임천 분교회(忠南 扶餘郡 林川 分敎會) 목사(牧師) 장석천(張錫天) 씨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기가 대단이 거북스러운 듯한 기색을 보이며 방문한 조사위원과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는데, 종교의 유래와 내부조직은 어찌 되었는가? 문제의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는 거듭 사십년 전 영인(英人) 편위익(片爲益) 선교사 두 사람의 사도(師道)로부터 함경남도 원산에 총본부(總本部)를 두고 권조 전기라 만주와 서백리아 서백리아(西伯利亞)는 지금의 시베리아.
(滿洲와 西伯利亞)에서 우리 동포가 있다는 곳은 어디든지하고 분교회(分敎會)를 두었다 한다. 그런데 이 동아기독교단이 종교(宗敎)는 일정한 명칭도 없이 막연하게도 그저 하나님을 신봉한다는 것으로만 교리(敎理)를 받아오다가 사오년 전에 비로소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라 명명하였다 하며, 그동안 세상 사람들은 침례교(浸禮敎)라고도 불렀으나 실상은 침례교는 서양에 따로 있을 뿐이요. 자기네 교회는 침례교도 아니라 한다.
이렇게 사십여년(四十餘年) 동안에 일정한 명칭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신봉하여 내려온 종교(宗敎)의 하나인 동아기독교는 과학적 상식(科學的 常識)에 눈이 어둡고 경제적 지식(經濟的 知識)에 목이 마른 우리 민족(民族)에게 복리(福利)의 영예(榮譽)를 얼마나 끼쳐 주었든가?
의식 있는 자로서 모공이 손연하리만치 미운 동아기독교 내 그 조직을 검토하여 보면 그 조직부터 다른 교회보다 특이하다. 이 교회는 감목 한 사람이 있고 그 다음 감목의 지배를 받는 목사(牧師)와 그 아래에는 교사(敎師)가 있다 한다. 그런데 아들 목사들은 교사를 선택하는 데도 어떤 자격을 보아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라도 하나님을 신봉하고 양 같이 순직하며 감목(監牧)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도 절대 복종을 잘하는 자로서 수다한 교도(敎徒)를 영솔하게 한다.
<問答(문답)> 귀 동아기독교의 교회 수와 교도가 약 얼마나 되느냐고 하니 장 목사는 매우 주저하다가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알려고도 않고 그만큼 안 것을 알만한 통신이나 간행물(刊行物)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말을 막으며, 교도들과 하는 법설(法設)을 한참 머뭇거린다. 그래 교도들의 명부(名簿)도 없고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교인 수는 모른다 할지라도 대개 교회 숫자도 모른단 말입니까? 하니 예! 조선, 만주, 서백리아(朝鮮, 滿洲, 西伯利亞) 전체에 열일곱 개소가 있고 교인의 명부록(敎人名簿錄) 같은 것은 꾸며 놓지를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도 없고 성경 말씀에 의해 그런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알고 우리 교회에서는 오륙년 전부터 그러한 방침을 세웠습니다.
귀 교회는 적으나 비현대적입니다. 학교교육은 왜 못하게 합니까?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나면 쓸데없는 허영심(虛榮心)만 가득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반대로 행동을 취함으로 일체 위험한 과학사상(科學思想)을 배척한다 하며, 지난 유월경에 모보에 소개되었던 자기의 아들을 공부 못하게 한 전말을 역력히 되풀이한다. 그러면 동아기독교는 인류(人類)의 복리를 떠나 도리어 노예(奴) 양성에 몰두할 이만 입니까? 글쎄올시다. 이 사람도 학교공부를 못시키게 하는 데는 여러 해 동안 반대도 하여 보았습니다. 하고 그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불합리한 것이 많다고 하다가 그 말은 다시 물어볼 수 없어 화제를 돌리고 만다.
교회의 교육사업(敎育事業)은 그만두고라도 다른 자선사업(慈善事業)이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 사업도 안 합니다. 그저 신구약(新舊約)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도로 살다 죽으면 천당 가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연보 같은 것은 거두어서 교육, 자선사업 같은 것도 안 하고 어디에 쓰십니까? 본래 빈약한 교회라 연보 같은 것도 넉넉지 못합니다.
간혹 매우 가난한 동포가 불의의 재앙이 있을 때에 쓰고 그 나머지는 감목(監牧)의 월급으로 쓴다고 한다. 유급자는 몇이나 되며 얼마씩이나 지급합니까? 감목 한 사람뿐인데 모든 것을 감목이 독단으로 처리하고 다음해 대화회 시에 결산보고를 한다고 한다. 편 감목의 혼자 노임이라면 목사들은 무엇을 합니까? 우리 목사는 오직 직책이 있을 뿐으로 봉급도 없고 제 구역에 있는 교도를 인도하며 사후에 천당 가는 것만 희망합니다. 너무나 막연한 희망입니다. 감목은 누구이며 어디서 공부한 사람입니까? 전치규(田穉珪)라는 사람이온데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아니외다 하며 나오는 말을 피하며, 단지 임천교회의 유래를 말하는데 창설 당시에는 남녀교인이 각지로부터 수백 명씩 모였었으나, 흥왕하더니 지금은 겨우 남녀노소 합하여 오육십 명(五六十名) 밖에 안 됩니다. 이곳 임천(林川)에 창설되기는 삼십년 전에 편위익 선교사 부부의 노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순응은 고사하고 도리어 시대에 역류(逆流)하는 행동을 의심 없이 강행할 뿐이다. 대체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란 교단은 계룡산하(鷄龍山下)에 정도령 도읍(鄭道令 都邑)을 몽상하는 보천교도(普天敎徒) 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들보다 더 어리석다 안할 수 없다. 이제 세상 사람에게 의혹을 받게 된 첫 동기는 전에 장석천(張錫天) 목사의 아들이 첫 작년 가을에 경성 모 중학교(京城某中學校) 고등과(高等科)에 입학한 것을 원산(元山)에 있는 동 교회(同敎會) 감목 전치규(監牧 田穉珪)가 알게 되어 야단이 나는 바람에, 전에 장목사는 부득이 자기 아들을 소환(召喚)하여 집에서 놀게 하였는데, 금년 봄에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扶餘郡 林川面 舊敎里) 사립학교 성육학원(私立學校 聖育學院)에서 고등과(高等科)를 설치하고 학생모집을 하게 되는 때에 동 학교장(同學校長) 모씨가 전에 장목사를 방문하고 여러 가지로 권고하여 장목사로부터 허락이 있어 두 명의 학생이 매일 같이 통학하는 중 전에 감목 전치규(田穉珪)가 알고 원산에서 일부러 천여 리 되는 곳을 찾아와서 절대로 학교에 못 가게 한 사실인데 세상 사람은 이점에 대하여 크게 비난하는 바이다. 주저주저하며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장목사님에게서 그 이상 더 들으려야 들을 수 없음으로 이것으로 말을 마치는 바이다. <호서기자동맹 서구지부 발표>
이정훈 전도사 / 침신대 출판부 편집장, 침례교역사신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