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는 A.D 66년경 바울이 2차로 로마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쓴 편지이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주동한 폭동 때문에 바울은 체포됐다. 이 당시는 네로황제의 재위기간으로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많았던 시기였으며, 감금된 감옥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사슬에 매여 있었고, 아마도 암실이나 지하 감옥에 갇혀서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바울의 옆에서 변호를 해주던 사람들이 거의 다 바울을 떠나고 누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믿었던 사람들이 바울의 곁을 떠나고 극심한 핍팍과 박해 가운데 이미 자신의 인생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떠날 날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수고를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천국에 입성했을 때, 의의 면류관으로 보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딛후4:6~8).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의 영의 아들 디모데가 교회의 리더로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따스한 마음으로 격려하며 교훈하고 있는 것이 디모데후서이다. 이 서신을 통하여 오고 가는 세대속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길을 어떠한 자세와 어떠한 모습으로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육체적으로는 최고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그 고난 속에서 최고의 영적 걸작품을 남겼다. 바울과 같이 최고의 어려움속에서도 위대한 작품을 남긴 사람이 조선 시대의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천재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나 정조가 죽고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도였던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인생 황금기인 40~50대를 감옥 같은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냈다. 그의 유배가 이리 길어진 이유는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비리를 정조에게 고발했는데 서용보가 정계로 복귀해 실세가 되면서 정약용의 사면을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유배였지만 다산은 그곳에서 목민심서 외 무려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정약용에게 유배지는 감옥이 아니라 다산학의 성지였던 것이다. 만일 유배지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낙심하며 세월을 보냈다면 그는 아무것도 못 했을 것이다.
감옥 같은 환경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옥이 될 수 있고, 반면 나를 거듭나게 하는 변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사도바울도 그의 많은 서신들이 감옥에서 기록됐다. 만약에 감옥이라는 환경이 없었다면 사도바울의 주옥같은 옥중서신들도 없었을 것이다.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다. 고난도 때로는 유익이 된다. 오늘 하루의 삶이 고난 중에 있다할찌라도 낙심치 말고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