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불화가 쿠데타로 이어진 최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장면인지, 현실 상황인지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비상 상황에 극도의 공포심을 느낀 다윗,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다윗이…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가자…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14).
부자지간의 싸움이 온 나라를 뒤흔드는 싸움이 됐다. 아들이 아버지의 왕관을 빼앗겠다고 일으킨 반란, 이건 쿠데타다. 생명까지 노린다. 쿠데타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다(12). 눈치 빠른 모사들과 장군들도 가담한 것, 피신해서 지은 시를 보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3:1). 민심도 완전히 돌아서고(13), 반란의 물결이 거세다. 어제의 충성을 휴지처럼 버리고 반역의 깃발을 마구 흔들어댄다. 최악이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부자지간이 아니다. 나중에 아버지의 후궁들을 압살롬이 공개적으로 취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인륜보다는 권력 찬탈의 야욕만 충만하다. 황급히 도망치며 다윗은 열 명의 후궁을 남겨두는데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한다(16).
광야로 도망친 처량했던 피난길
정세 판단이 빠른 다윗, 우물댈 시간이 없다. 도망친다. 예루살렘은 방어하기는 좋지만 고립되기도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처량하다. 울며 광야로 떠난다(23). 머리를 가리고 우는데 맨발(30), 그만큼 급했다. 통곡하며 떠난 도주, 아들로 인해 권력을 잃은 신세가 처량해서 울었겠지만 그보다 이 상황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며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나마 함께 하는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런데 이 비극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다윗답다. 가정이 파탄 나고 민심도 떠나고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만한 최악의 상황 속에서 다윗이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다. 자기 죄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 그래서 이 피난은 처량하기만 한 피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피난이 된다.
광야에서의 고백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3:3). 아들이 버리고 세상이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사람들이 치려고 달려들어도 하나님은 나의 방패라 하고,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무시해도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라 하며, 절망과 수치와 공포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피난 가면서도 하나님은 나의 머리를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다(시3:6).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한다(시3:7).
다윗은 광야에서 기도를 회복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이런 다윗을 보며 “다윗의 인격이 형성되었던 광야에서 다윗의 다윗다움이 다시 회복됐다”고 했다.
피난 중에서 곁을 지켜준 사람들
권력을 잃고 처량하게 맨발로 울며 도망치는 데도 다윗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난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끝까지 다윗과 함께 하는 사람들, 그들이 너무 귀하다.
첫째, 잇대라는 사람이 함께 했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일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이 있댄다. ‘잇대’, 블레셋 가드 출신의 이방인이다. 재미있는 것은 잇대와 함께 블레셋 가드 사람 600명이 다윗을 호위하며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잇대는 아마 용병이었던 것 같은데 용병이라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익이 아니라 의리를 택한 사람이다(21). 그가 언제부터 다윗 곁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때 친구가 진짜 친구, 다윗에게는 이런 친구가 많다. 오랜 세월 고난 중에 만났던 친구들, 그들은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같은 친구였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 둘째는 사독 일행이다. 레위인과 함께 법궤를 들고 따라나섰던 사독, 나중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됐고 아론을 잇는 정통 대제사장 가문을 형성한다. 하지만 제사장이 법궤를 들고 따라나서려 한 것은 잘못된 것, 다윗은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할 도구로 법궤를 이용할 생각이 없다. 다윗에게는 법궤보다 하나님이 중요했다(25). 잘한 것, 이래야 한다. 법궤 같은 껍데기 붙들고 만족하면 안 된다. 교회도 사실 껍데기,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과 그 아들들에게 스파이 역할을 하게 한다.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참 올곧다. 그래서 다윗의 이런 모습 때문에 사독 일행도 다윗과 마음을 합한 것 같다.
함께한 사람 중에 의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시바다. 다윗 일행을 도우려고 두 나귀와 먹을 것을 잔뜩 갖고 온 사람, 하지만 다윗에게 므비보셋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사람이다. 므비보셋이 차제에 왕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윗은 므비보셋의 소유가 다 네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이 다시 화려하게 복귀할 때 마중 나온 므비보셋은 그때 자기도 나가려 했는데 시바가 막았고 자신을 모함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다윗이 떠난 이후로 슬픔의 표시로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다고 한다. 얘기가 다르다.
난감해진 다윗은 재산을 다시 둘로 나누어 시바와 므비보셋에게 각각 준다. 므비보셋도 믿어야 할 것 같고, 외롭고 힘들 때 먹을 것과 나귀를 가지고 왔던 시바도 고마웠기 때문이다. 누가 옳았는지는 성경도 판단하지 않았다.
비난하고 배신한 사람
아들의 쿠데타 때문일까? 아니면 성폭행과 청부살인한 다윗이기 때문일까? 시편에 보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시3:2). 심지어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다”고까지 했다. 아마 칼로 찌르는 것 같이 아픈 소리였을 것이다. 비난이라기보다 저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난한 사람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시므이였다. 시므이는 다윗의 피난길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한다(16:7~8). “썩 꺼져라! 쓸모없는 늙은이, 더러운 살인마!” 그런 셈이다. 힘이 있을 때에는 아무 소리 못하던 사람이 소리치며 따라온다. 시므이만 그랬을까? 추측건대 여기저기서 그런 소리 했을 것 같다. 세상인심이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이 분노하며 시므이의 목을 베려고 하자 다윗이 막는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6:10~11) 다윗은 그의 저주를 하나님이 명하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욕먹을 만하다고 여긴다. 이는 광야에서 겸손을 회복했기 때문일 것 같다.
‘사람이 욕은 먹지 말고 살아야지’ 그런 소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욕 한번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도 욕먹으셨다. 귀신 들렸다는 소리도 듣고 미쳤다는 소리도 들으셨다. 그렇다면 욕 좀 먹거나 고난당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자신의 죄는 달게받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16:12). 실제로 이 믿음대로 주님은 다윗에게 선을 베푸신다. 나중에 다시 왕으로 귀환할 때 시므이가 용서를 빌며 다윗에게 무릎을 꿇는다(19:19). 살려달라는 것, 하나님이 다윗이 당한 수모를 갚아 주신 것이다.
다윗에게 비수를 꽂은 사람이 또 있다. 아히도벨이다. 아마 압살롬 다음으로 다윗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일 것이다. 유진 피터슨이 “그는 현명하다고 평판이 난 사람, 다윗의 신임을 받은 조언자요, 믿음직스럽고 사려 깊은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인물, 그가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16:23)이라 할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다윗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배신했다. 심지어 압살롬에게 다윗 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권하기까지 한 사람이 바로 그다. 다윗은 지는 별이고 압살롬은 떠오르는 별, 대세가 기울었다는 생각에 배를 갈아탄 것이다. 눈치 빠른 기회주의자, 온화하고 현명하다는 명성 이면에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소인배에 불과한 사람, 대중적 이미지는 멋진 사람이었지만 실제는 줏대 없는 인간, 도덕적 뼈대도, 영적 근육도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다윗이 얼마나 충격을 받고 분노했는지는 시편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시55:12~14, 새번역) 이어서 “나의 옛 친구가 손을 뻗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치는구나…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욕되게 하는구나. 그의 입은 엉긴 젖보다 더 부드러우나 그의 마음은 다툼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55:20~21).
그런데 다윗은 복수보다 기도를 택한다.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15:31). 방파제가 무너진 것 같은 시대를 맞고도 다윗은 다윗답게 지금 회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