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언 킹’에는 유창하게 말하는 동물들이 나온다. 그들은 완벽한 언어능력만 갖춘 게 아니라 정교한 정치적 활동까지 능숙하게 해낸다. 어린 사자가 억울함을 풀고 복수에 성공하는 사건 전개도 재밌지만, 동물들이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즐거움을 안겨 준다. 이런 영화적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하나님께서 사자에게 고도의 지능을 주시어 인간 대신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음만 살짝 바꾸시면 될 터이니 실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듯도 하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딱 하나,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리 통치자)으로 삼는 언약을 인간에게 주신 후 겸손과 사랑으로 피조물을 다스리라 명하셨다(창 1:26~27). ‘하나님-인간-타피조물’로 이어지는 이 언약적 창조질서는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포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질서를 스스로 존중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후,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휼(體恤) 하시고, 십자가로 인간부터 구원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온 인류를 구원키 위해 먼저 구별된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피조세계의 구원을 위해 먼저 구별된 존재가 됐다.
로마서 8장은 창조질서에 따른 하나님의 총체적 구원 드라마를 생생한 언어로 들려준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절). 이를 통해 창조 언약에 속박된 채 인간 타락으로 생겨난 유탄을 맞아 비참하게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로마서는 이런 삶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허무함에 굴복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길 역시, 하나님에 의해 완벽히 막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이 ‘허무함에 굴복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님의 아들들”(19절), 곧 예수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29절) 그리스도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체휼하셨듯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피조물의 탄식을 체휼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자기들도 이르게 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21절). 모든 반려동물, 이름도 없는 들꽃, 동물원에 갇힌 맹수, 북극에서 멸종되어 가는 곰,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본문은 말한다(22절).
오늘 우리는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피조물의 탄식을 체휼하며 생명을 나누는 이가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온 피조세계를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