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의 세 복음서 모두에는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시장하여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일과 예수께서 오른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마12:1~14, 막2:23~3:6, 눅6:1~11). 모두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다루고 있는데 이를 이야기 식으로 재구성하여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맥추절이 가까운 어느 안식일에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의 두렁길을 가고 있었다. 길이 너무 좁아 밀 이삭을 두 손으로 헤쳐 가며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이삭들의 모습이 마치 일렁이는 황금물결처럼 아름답다.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예수와 그 제자들은 배가 고플 때가 많았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잘 익은 밀 이삭은 군침이 돌게 했다. 제자 하나가 이삭 두어 개를 잘라 두 손으로 비벼 호호 불어서는 입에 털어 넣는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제자들도 그리했다. 바리새 파 사람 몇이 조금 떨어져 그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정죄를 위한 밀착감시인 셈이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동에 쾌재를 불렀다. 이 정도면 월척이 아니라 대어중의 대어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바짝 따라 붙어 예수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당신 제자들이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거요? 무엇 땜에 안식일을 범하느냔 말입니다.”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를 하는 것이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탈곡을 하는 일, 그리고 입으로 부는 것은 키질을 하는 일로 모두가 안식일에 금지된 행위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참 뜻을 알지 못한 탓이었다. 안식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해 만든 날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안식일을 문자적 실천만을 강조하여 오히려 사람에게 부담과 괴로움만을 주는 날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는 그들과 마주했다.
“당신들은 다윗과 그 부하들이 굶주렸을 때 했던 일에 대해 쓰인 글을 읽어 보지 못했소?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었소.”
다윗과 그 부하들이 자기들을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쫓기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 한 말이었다.
‘하나님의 집’은 성전이 아직 건축되기 전의 회막(會幕)을 말하며, ‘진설병’은 진설상에 차려서 하나님께 드리는 떡을 가리킨다.
“그리고 말이오, 성전 안에서 만큼은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율법에서 읽어보지 못했소?”
제사장들은 여느 날보다 안식일에 더 바쁘다. 하나님께 숫양 두 마리로 두 번의 제사를 드려야 하고, 향도 피우며 식어 굳어진 떡을 뜨거운 진설병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 바리새 파 사람들의 예외 없는 규례의 적용으로라면 분명히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안식일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禮拜)를 드리는 일은 어떠한 규례보다 우선한다. 제사 자체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례보다 상위의 법이라는 말이다. 하위의 법은 상위의 법 앞에서 무력해진다는 것을 저들은 알지 못했다.
“잘들 들으시오. 성전보다 더 큰 사람이 여기에 있소.”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스러운 곳이므로 정말이지 크다. 그런데 예수는 그 제사를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자 자신이 곧 하나님이므로 성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다.
“하나님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의 제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와 나누는 자비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당신들이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오.”
율법이 진정으로 바라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면 시장으로 인한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오.”
안식일은 육체뿐 아니라 영적인 쉼을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규례인데, 영적 쉼은 죄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일, 그러니까 밀밭 사이 두렁길에서의 일이 있고나서 두어 주가 지난 어느 안식일이었다. 예수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오른손이 오그라진 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에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도 와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그에게 어떻게 할지를 숨을 죽이며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예수를 고소할 꼬투리를 잡고자 했다. 그러는 가운데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불쑥 예수를 향해 물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저들의 속내를 모르지 않은 예수는 일부러 손 오그라진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세요.”
그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사람들 틈을 걸어 정신없이 예수에게로 나왔다. 그도 예수가 많은 이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를 옆에 세워 놓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양이 안식일 날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그것을 보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끌어내지 않겠습니까? 양 같은 짐승도 끌어내야 하는데, 하물며 여러분은 사람을 끌어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사람이 양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귀하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습니까,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기 바랍니다.”
저들은 이렇다고도 저렇다고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수는 저들의 굳은 마음을 알고 슬퍼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옆의 손 오그라진 사람에게 말했다.
“손을 내밀어 펴 보세요.”
그는 시킨 대로 했다. 그런데 오그라진 손이 부드럽게 펴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다른 사람들도 할렐루야를 외치며 찬양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약이 오를 대로 올랐으나 사람들 때문에 어떻게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돌아가서 그들은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를 지지하여 정치적 이권과 신분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세속적 당파인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해서 죽일까 하고 계획을 세웠다.
율법은 안식일을 기억해 거룩하게 지키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법이다. 그러니 율법을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실질적 실천이 아닌 과시적 남용이다. 그들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내면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자구의 암기식 지식을 과시하며 허세부리기를 일삼아 스스로를 그 틀 속에 가두어 놓았다. 그 결과가 낳은 것이 율법의 남용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가.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는 어떠한가. 예수님 당시의 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의 많은 지도자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면적 의미는 외면한 채 외적 표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남용하려 한다.
성경이 순종하라 했다며 자기에게 순종하라 강요한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같은 것은 폐기처분한지 오래고 자랑이라도 하듯 성도들 위에 군림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저만치 밀어내고 물질과 명예와 권력 같은 것을 강조하며 그런 것들을 얻은 사람을 보고 축복받았다고 한다. 그런 것들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탓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여우고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도 없다”(마8:20)고.
임종석 목사 /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 충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