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속담에 ‘Haste makes waste’라는 말이 있다. ‘서두르면 망친다’라는 뜻이다. 신앙생 활도 그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Word)과 하나님의 뜻(Will)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Way) 을 알아야 하는 것,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고 하셨지만 어떤 방법으로 왕이 될것인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셨고, 다윗은 지금 계속 도피생활 중이다. 이게 뭔가 싶은 때도 수없이 많았을 것, 그런데도 다윗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림의 대가, 기다림이 승리를 불러왔다.
조급한 사울 왕
본문은 도망자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십 사람의 밀고로 시작된다. 사울은 즉각 정예 용사 3000명을 이끌고 토끼 사냥하듯 다윗을 잡겠다고 나섰지만(2절) 정작 결정 적으로 승기를 잡은 것은 다윗이다. 상황은 24장과 비슷하다. 엔게디 동굴에서 용변 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것, 그때 사울은 감동을 받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며 헤어졌었는데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해오던 사울과 그 군사들 모두가 다 깊이 잠이 들었다.
다윗 입장에서는 엔게디 동굴에서 살려줬기 때문에 이런 위기를 맞았으니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치실 것이라며 이번에도 죽이지 않고 창과 물병만 훔친다. 감동한 사울은 이번에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울 왕은 그냥 돌이키고 자기 인생을 살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다윗을 질투하고 쫓는 것이 꼭 자기 인생의 목적인 듯 한결같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반복이고 그것이 쌓여 운명이 되는 모양이다. 불행도 선택, 다른 선택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사울은 끝내 바꾸지 않았다.
조급함, 초조함이 인생을 망친 것이다. 24 장에서 다윗을 끌어안고 소리 높이 울기까지 했었다면(24:16~17) 멈췄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급함과 초조함, 결국 그 때문에 망하는 길로 간다. 그 모습이 마치 애굽의 바로 (Pharaoh) 같다. 바로는 군인들을 이끌고 홍해에 수많은 군사들이 수장당할 때까지 추격 하며 하나님께 맞을 짓 하다가 크게 맞고 말았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시대에 맞게 좀 달라져야 하는데 권력이나 기득권만 장악하면 양보가 없다. 그런데 고인 물은 썩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는 법, 자기 변화를 시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기다리는 다윗
반면에 그동안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다윗은 여기서는 처음으로 공격적이다(5절).
쫓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어느 정도 세력도 얻고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일까? 꼭 전쟁 하는 양 진영 같다. 사울과 그의 군사령관 아브넬이 등장하고 다윗 편에서는 그 군대 장관 요압과 그 아우 아비새가 등장한다. 다윗은 매복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울과 그 군대가 모두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7절). 다윗의 매복이나 기습은 생각도 못했던 것일까? 불침번도 없다.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 가까이 가도 아무도 모른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잠들게 했다”고 한다(12절). 마치 죽이라고 기회를 만들어주신 것 같은 상황이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잠이 다윗에게는 평안과 휴식이었지만 사울에게는 패배를 부르는 잠, 하나님께서 ‘잠 ‘이란 방법으로 이 전쟁에 개입하셨다. 3000 명의 군사 모두가 다 잠 때문에 무력화됐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 이때 아비새가 한 말이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8절). 지난번 엔게디 동굴에서도 부하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회”라고 했었다. 사울을 버리신 분도 하나님, 다윗을 차기 왕으로 정하신 분도 하나님, 사울과 전 병력을 잠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맞지 않나?
그러나 상황이 호전되거나 기회가 주어졌다고 덥석 물면 안 되는 것일까? 하나님이 주신 기회일 수도 있지만 시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다윗은 죽이지 않는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기다리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원칙이 중요하다. 길 가다가 1억 원이 든 가방을 주우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가? 아니다. 신앙인이 그러면 안 된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이 천하만국의 권세를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했을 때 단호히 물리치 셨다(마4:10). 영광에 현혹되면 안 된다. 영광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주어지는 것, 다윗은 현혹되지 않았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9절) 이게 바로 신앙이고 관용이다. 우리 민족은 다윗에 비해 너무 관대할 줄을 모르는 편, 관용은 커녕 오히려 너무 잔인한 경향이 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 하노 니”(10절), 이게 관용의 비결이자 핵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금하신 일”이라 했다(11절). 대단한 결단, 자신의 안전보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물론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 맞나 싶을 정도로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의 핵심이 기다림 아닌가? 다윗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물맷돌을 던지는 것도 믿음이고,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다리는 것도 믿음, 그 한결같은 기다림이 결국 승리를 가져왔다. 눈앞의 영광이나 승리에 현혹됐다면 다윗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반역자, 은혜 없는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쫓기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의 절대 신앙이 돋보인다. 다윗에게는 왜 분노가 없었겠나?
왜 끝내고 싶은 마음 들지 않았겠나? 그러나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다. 병으로 치든지, 자연사로 죽게 하든지, 전장에서 망하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 너무 아름답다. 결국 사울은 전장에서 망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노력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원칙과 정당성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윗을 보라.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한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훗날 바울은 안디옥에서 다윗을 이렇게 평가한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다”(행13:36).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 13:22). 위기 때 변절하기 쉽고, 영광 앞에 유혹되기 쉽고, 상황윤리를 말하기도 너무 쉽지만 다윗은 초지일관, 절대신앙! 그래서 바울은 그런 다윗을 높이 평가했다.
승리하는 다윗
다윗은 멀리 산꼭대기에 서서 사울과 그 군대를 불러 깨운다. 깜짝 놀라 일어난 사울과 군사령관 아브넬은 혼비백산한다. 다윗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고 적장 아브넬을 꾸짖는다(15절). 코미디 같다. 사울의 군대가 웃음거리 된다. 아브넬 입장에서는 수치, 치욕이지만 다윗편에서는 엄청난 무용담이다. 마치 다윗과 사울의 일대일 맞대결에서 승리한 것 같은 분위기다. 권위를 상징하는 왕의 창을 빼앗았다. 다윗을 벽에 박으려 했던 창, 사울을 지키는 분신 같은 창, 그 창을 빼앗은 것, 사울의 패배와 다를 바 없다. 사울의 자기 반성도 따랐다(21절). 거짓말인가? 아니다. 나중에 또 변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이번 선언은 사울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 다(25절). 그 후 각기 제 길로 갔고 더 이상 마주치지 않았다. 마지막 만남, 최종 승자가 다윗이다.
본문은 선택의 기로에서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수도 없이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내 선택과 다르게 일이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야곱이 그랬다.
첫날 밤을 치르고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 순정파라 훗날 라헬과 또 결혼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의 혈통을 쫓아 유다가 태어나고, 유다의 혈통을 좇아 예수님이 태어나신다. 야곱의 선택과는 다른 결과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다윗의 밧세바와 간음은 일생일대의 최대의 범죄였지만 그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이 태어나고 솔로몬의 혈통을 좇아 예수님이 탄생하신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바울이 그랬다. 툭하면 구속되지만 구속 상태에서도 글을 쓰기 시작해 탄생한 서신서가 신약의 절반이나 되고, 그 서신서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세운다.
다윗도 그랬다. 계속되는 도피생활로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그 시련이 그를 견고한 왕으로 세워간다.
어느 날 느닷없이 왕이 되었던 사울과는 다르다. 사울은 불안하고 그 자리가 흔들리자 조급증에 시달렸지만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시련을 쌓은 다윗은 승리의 사람, 그의 승리는 기다림의 승리였다.
이희우 목사 /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