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는 얼마나 아팠으면 ‘너도 아프니?’라는 시에서 날아온 새나 꽃과 나무에게도 ‘너도 아프니?’라고 물었다고 했고, ‘환자의 편지’라는 시에서는 아플수록 침묵했다고, 남몰래 울기도 하고 괴로워 잠도 못 잤다고 했다.
또 ‘암세포에 대한 푸념’이란 제목의 시에서는 “약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대요”라는 첫 문장으로 시를 썼다. ‘마지막 편지’라는 시를 읽을 땐 이젠 정말 마지막인가 싶었지만 고맙게도 75세인 이해인 수녀가 우정을 주제로 한 글을 모은 ‘친구에게’라는 에세이를 2020년 7월에 출간했었다. 인생의 마무리를 너무 멋지게 잘하는 분인 것 같다.
반면에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의 마지막은 너무 외롭고 추하다. 사무엘상 후반부가 다윗 중심이었는데 본문은 초점이 사울에게 맞춰진다. 마지막이 임박한 때, 죽기 직전의 사울,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무당 이야기, 그것도 무녀는 긍정적이고 사무엘은 오히려 좀 부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분위기다.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명예와 특권을 누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질투심 때문에 무너지면서 갈 데까지 간 사울, 선을 넘었지만 마지막이라도 아름다운 퇴장이면 좋겠지만 마지막이 너무 두렵다. 급기야 어처구니없게 신접한 여인까지 찾는다.
절박했기 때문
블레셋이 침공해 오면서 사울은 절박한 처지가 됐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넴에 진 치고, 사울은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을 쳤다(4절). 사울은 북쪽 지파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차단당할 위험에 빠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온 이스라엘을 끌어모았지만 역부족이다. 승산이 없어 보인다(5절). 정신적 지주 사무엘마저 죽고 없다(3절). 수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괜찮을 텐데 일체 말씀도 없으시다(6절).
핵심은 말씀의 기근!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기도해도 말씀이 없다. 어떤 계시도 없다.
선지자들도 잠잠하다. 이처럼 답답한 때가 있을까? 불평을 하던지 소원을 아뢰든 기도가 특권인데 모든 것들이 차단된 상황, 그래서 혼란스럽고, 허무하고, 무기력감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정말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울에게 말씀하셨만 순종과 회개가 없었던 것, 늘 고집대로 살며 습관적으로 불순종했다. 지하세 계에서 올라온 사무엘이 사울에게 했던 말은 이미 사울이 들었던 말(17절),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는데 답답하게도 자꾸 왜 말씀이 없으시냐 그러고 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으면 추해진다. 절망한 사울은 어처구니없게도 신접한 여인을 찾는다.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는 가증한 행위, 사울 또한 금지한 행위다(3절). 그런데 사울의 신하들이 그런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무당 축출 특별왕명 그 자체가 완전히 수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도 사실은 그동안 몰래 점치러 다니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여하튼 사울은 떳떳하지 못하니 변장하고, 그것도 밤에 비밀리에 무당을 찾아간다(8절). 왕답지 못하고, 신앙인답지도 못한 추한 행동이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가 사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부흥이 멈췄는데 왜점집은 부흥할까? 목사는 10만 명도 안 되는데 100만 명이 넘는 무당,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복 빌어주는 자 취급을 받고 있다. 성도들이 말씀을 듣기는 하나 이념과 욕망으로 가득하고 여기에 온갖 무지를 발라 이를 미화한다. 본질을 잃은 추한 모습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사울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신접한 여인이나 박수는 유대의 이단, 박멸해야할 대상이다(신18:10~12). 이스라엘 땅에서 다 쫓아낼 만큼 교리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뿔 달린 괴물이요, 이단의 괴수요, 악의 화신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엔돌의 무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너무 친절한 무녀씨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울을 오히려 위로한다.
사울은 엔돌의 무녀에게 신접한 술법으로 죽은 사람을 하나 불러내라고 명령한다. 무녀는 왕이 금한 것이라며 거부했지만 사울이 여호와께 맹세하며 안심시킨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쫓아냈던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접한 여인의 생명을 보장하기까지 하며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무당이 불러내는 수준으로 생각한 것, 망령된 것 아닌가? 무녀는 왕의 명령대로 사술로 죽은 자를 불러낸다.
겉옷을 걸친 노인의 모습으로 올라온 사무엘의 영, 무녀가 스올에 잠들어 있던 사무엘을 깨웠다는 것이다. 영이라 표현된 이 존재는 사무엘도 그 영혼도 아닌 ‘망령’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귀신’이다. 칼빈을 위시한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유령 따위가 사무엘의 영을 흉내 낸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그 사무엘 귀신이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19절)라고 한다. 이미 그전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에게 일러 주셨던 말씀, 사울이 죽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로 한 마디 없이 사라진다. 사울은 땅에 완전히 엎드러졌다고 했다(20절). 밥 먹을 기운도 없고 먹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울을 친절한 무녀씨가 위로한다 (21~22절). 그리고 사울 일행까지 강권해 먹을 것을 준다(24~25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셨던 왕이 무당에게 위로받고 있다. 마치 무녀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다. 무녀는 목숨을 걸고 사울을 도왔다고 한다(21절).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말씀은 전달됐다. 엔돌의 무녀와 관련된 내용을 성경이 이렇게 길게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울이 망한 이유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무녀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가 됐다.
예수님의 탄생의 별자리를 보고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도 ‘마고이’라 불리는 점성술사들, 복음서는 이단자는 경배하고 정작 진리를 소유하고 있던 자들은 외면하고 죽이려 한다고 했다. 성경에 묘사되는 엔돌의 무당, 부정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성경은 사울을 위로하고 먹이는 무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도하며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자가 그 누구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었음을 부각시킨 느낌이다.
여기서 얻는 팁은 교회에는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리보다 사랑이 앞서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놀라웠던 이유는 강도 만난 자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이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들이 악마처럼 생각했던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이다. 선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선하지 않고, 악인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지극한 사랑을 행한다. 어떤 이유보다 사랑이 우선이어야 한다.
냉정한 사무엘로 인한 절망
친절한 무녀씨와 달리 사무엘 신은 너무 냉정했다. 사울에게 왜 깨웠냐 귀찮게? 그런 투로 말한다(15절). 사실 돌이켜보면 살아있을 때도 사울에게 늘 차가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서 그랬을까? 볼 때마다 책망만 했다.
지금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사울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려는 모습은 1도 없어 보인다.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16절) 이게 첫 마디다. 또 나라를 다윗에게 넘긴다며(17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19절), 내일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울의 심장을 후벼 파는 말들만 한 것,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절망한 사울을 더 절망케 한 것은 사실이다.
욥기에 보면 재산을 잃고, 자식들을 잃고, 죽을병에 걸린 욥을 찾아온 세 친구는 욥에게 훈계한다(욥5:17).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합한 말도 아니다. 차라리 같이 울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바른 소리보다 위로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목회자는 교리도 중요하지만 사람부터 봐야 한다. 어떤 목회자는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절대 집례하지 않는다. 불신자의 장례식에 가서 지옥 심판을 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교리만 보고 사람을 보지 않는 것 아닐까? 안식 일을 범했다고 바리새인들이 따질 때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하셨다. 교리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로해 줬다면 어땠을까?
사무엘은 오래전 과거의 일을 또 꺼낸다.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18 절) 죽을 때까지 정리하지 못한 사울의 잘못도 있지만 마지막을 앞둔 사울에게 지적질보다는 따뜻한 위로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사울은 불순종의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의 강변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이 씁쓸하다. 순종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감싸는 것은 사랑이라면 바른 소리 나 옳은 말하기보다 따뜻한 위로의 말과 음식부터 나누며 살아야 한다.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