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나라를 만들다
다윗이 만든 나라는 후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꿈이 된다. 그들은 늘 다윗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주변국에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다윗은 전성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그동안은 힘이 없어서 방어적인 전쟁만 치뤘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여기저기 눈치나 보는 찌질한 나라가 아니다. 외부를 정복해 가는 전쟁까지 치르는 완전 다른 나라가 됐다.
먼저 숙적 블레셋을 쳐서 항복을 받는다(8:1). 블레셋이 누군가? 지중해 서쪽에 위치해 삼손의 시대 이래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표격 외적 아닌가. 사울 왕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다. 그런데 그 블레셋이 다윗에게는 적수도 되지 못한다. 통쾌한 역사의 반전이다. 그리고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외적 모압도 정벌했다(8:2).
다윗과 이스라엘이 강성해지자 긴장한 아람의 도시 국가들은 연합해 다윗에 맞서지만 어림 없다. 그 첫 전쟁이 북동쪽의 소바 왕 하닷에셀과의 전쟁이었다. 다윗은 소바 왕국도 치고, 병거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말들의 뒷발 힘줄을 끊었다(8:3~8). 그때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를 도우러 왔을 때 아람도 물리쳐 아람 사람들도 조공을 바친다. 경제발전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 쾌거였다(8:7~8). 또 북쪽에 위치한 하맛도 무찔러 하맛 왕 도이가 아들을 통해 다윗과 화친 맺기 위해 금그릇, 은그릇, 놋그릇을 공물로 바친다(8:9~10). 북쪽 무역로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에돔을 정복하며(8:13~14) 남쪽 무역로도 확보한다. 그리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면서(주 에돔 이스라엘군)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게 하고, 동쪽의 암몬도 제압한다(10장). 이들 싸움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적은 다메섹에 수도를 둔 아람 왕국, 아람은 이후에도 남북왕국을 괴롭히던 가장 강력한 적이었지만 다윗은 간단히 제압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무역로와 상업활동의 자유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로부터 금, 은, 놋 등 엄청난 물량의 조공이 들어옴으로써 경제적으로 빠르게 강성해져 전성시대를 누린다.
그런데 다윗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조공물을 착복하지 않고, 여호와께 드렸다(8:11~12). 나중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드릴 때 보면 다윗은 과연 드리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 같다.
이스라엘의 지경이 넓어졌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의 땅을 차지했다(수1:3~4). 위로는 유브라데 강까지, 그리고 해지는 쪽 대해, 지중해를 주겠다고 하셨는데 블레셋까지 복속시키며 여호수아가 받았던 약속이 다 이뤄진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하맛 어귀에서 애굽 하수까지’(왕상8:65), 한 마디로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 때 받은 약속도 이뤄진다. 하나님은 세 가지 약속을 주셨다. 땅과 큰 민족과 강성한 나라, 그런데 약속대로 그 땅을 주시고(창15:18),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셨다(창18:18). 하나님이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또 재확인해 주셨던 이 언약(신1:6~8)을 다 다윗 때 이루어 주신 것, 이는 하나님이 다윗의 전성시대를 열어주셨다는 뜻이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다
하지만 ‘다윗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될까 싶을 만큼 좀 당황스러운 측면도 있다. 다윗이 세속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다윗과 다르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예배자이자 대단한 시인이요 성군이었던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침략적이고 잔인하다. 다윗의 전성시대가 아니라 다윗의 타락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선 다윗의 정복 전쟁이 너무 폭력적이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 모압 사람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한 줄 길이만 살리고 두 줄 길이까지는 다 죽였다(8:2). 모압 군사의 2/3를 죽인 것이다. 또 아람 사람도 2만 2000명을 죽였고(8:5), 에돔 사람도 1만 8000명을 쳐죽였다(8:13). 그리고 아람 병거 700대와 마병 4만 명을 죽였다(10:18). 아무리 고대의 전쟁이라 해도 너무 죽인 것 아닌가? 결국 이것 때문에 다윗은 소원이던 성전 건축을 못한다(대상22:8).
그런데도 “다윗의 전성시대”라고 한 것은 8장 15절 때문이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행할새”, 과연 다윗답지 않나? 정의와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시는 이유일 것이다. 그 정의와 공의가 이스라엘의 기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지난 정부는 원칙과 신뢰를 중시했던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고 했지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이 아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0.7%밖에 차이가 없었다지만 나라다운 나라, 공평한 사회, 기회 균등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었기에 결국 심판을 받았다. 가치관이 건전해야 한다. 가치관만 그런 게 아니라 현실도 남탓, 책임전가하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린 다윗은 역할 분담도 잘했다. 군사 분야는 요압, 사관 곧, 세금과 군사 동원에 필요한 통제관직은 여호사밧, 제사장직으로는 실로의 제사장직을 계승하고 있는 아히멜렉과 예루살렘의 신흥 제사장인 사독을 세운다(8:16~17).
그런데 실수도 많았다. 아마 아들들을 사제로 세운 것이 대표적인 실수일 것 같다.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들이 되니라”(8:18)는 구절로 보면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다윗의 아들들은 제사장 일을 봤다”고 했다.
어느 번역이 맞을까? 둘 다 맞다. 제사장, 곧 ‘코헨’은 히브리 성경 텍스트이고, ‘대신’은 헬라어 70인역을 번역한 것이다. 문제는 한글개역이 주로 히브리 텍스트를 중심으로 번역하다가 여기서는 70인역을 번역한 것이다. 아마 다윗을 보호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다윗이 자기 아들들을 제사장 삼은 것으로 번역하면 이건 다윗에게 스크래치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히브리 텍스트로 본다면 다윗은 사울 못지않은 범죄이자 권력 남용을 한 것이다.
성경은 다윗일지라도 미화하려고만 하지 않는다. 미화는 커녕 실수나 잘못을 다른 역사책보다 더 적나라하게 폭로한 느낌이다. 11장의 밧세바 사건도 그랬다. 덮어주지 않는다. 제국의 왕, 다윗도 예외가 없다. 그러니 다윗이 전성시대를 맞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은혜의 사람답다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9:1) 아마 가장 다윗다운 부분, 다윗의 통치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것 같다. 10장 2절에도 다윗은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라고 했다. ‘은총’이란 단어가 돋보인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인자” “자비”로 번역되는 단어, ‘은총’은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관대한 태도다.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힘의 논리로 누르기만 한다면 수많은 약자들에게는 고통이요,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강자에게는 약자에 대한 헤세드가 있어야 한다.
다윗은 그 헤세드를 사울 집안의 남은 자에게 베푼다. 폭망하고 생존자라고는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유일한데 다윗은 그 므비보셋에게 사울이 가졌던 땅, 조상의 땅을 돌려준다. 재산과 신분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공로자도 아니고 죽어 마땅한 사람, 왕권 강화를 위해 죽여야 할 사람에게 베푼 파격적인 은혜다. 먼저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도 아니고, 충성을 다짐하며 은혜를 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풀되 심지어 날마다 자기 식탁에서 함께 먹게 한다(9:13). 비상한 재주나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불합리하다고 할는지 몰라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킨다. 금방 한 약속도 배신하고 변명하며 어기는 경우가 허다한데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북왕국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으로 탁월했기 때문이다. 다리를 못쓰는 므비보셋이 반란을 꾀하지는 못할 테니 안전하기도 하고 인심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한편 반대로 다윗의 은총을 파기하고, 10장에서 그의 신하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잘라 벌거벗겨 반발의 길을 갔던 암몬은 그 병사 4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패배를 당한다. 사태 판단을 잘못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다윗의 전성시대, 다윗을 축복하면 복을 받지만 다윗을 저주하면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몰랐던 거다. 그렇다. 자신의 힘이 강할 때는 자주의 길을 가도 되지만 부족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강자에게 기대는 것이 옳다.
우리는 어떤가?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항상 약자였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야 살 수 있다. 바울도 그랬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그때가 오히려 강한 때”(고후12:10)라 했다. 맞다. 다윗은 약한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했고 그래서 전성시대를 맞았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게 전성시대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