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 쓴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 3부작 중 제3권 제목이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이었다. 압살롬 세력의 쿠데타를 진압한 다윗은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되찾는다. 19장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왕의 귀환 장면이다.
화려한 귀환
쿠데타를 진압하고 권력을 되찾은 것은 큰 기쁨이지만 다윗의 귀환은 그저 기쁜 귀환이 아니었다. 압살롬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세만큼은 대단했을 것이다. 환호하는 백성, 다시 충성 경쟁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 귀환을 ‘화려한 귀환’이라 부르고 싶다. 물론 왕의 귀환에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칫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황제도 귀환한 적 있었다. 1815년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를 향해 진군한 것인데 국왕군의 군대들은 “황제 만세”를 부르며 투항했고 그의 귀환소식에 루이 18세가 급히 도망쳤다. 화려한 귀환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폴레옹이 파리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따라 기사 제목이 달라졌다. “괴수, 동굴을 떠나다”, “코르시카의 흡혈귀, 후안 만에 상륙”, “성난 호랑이, 기프에 나타나다”, “야수, 그르노블에서 밤을 보내다”, “독재자, 리옹에 다다르다”, “찬탈자, 파리로부터 60마일 지점에서 목격되다”, “황제, 퐁텐블로에 당도하다”, “황제 폐하, 어젯밤 튈르리 궁전에 입성, 신민, 환호로 맞이하다”였다. 이게 권력의 위력이다.
그런데 다윗 왕의 귀환 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다윗 앞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커밍아웃해야 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든지 자기 입장을 분명히 취해야만 했다. 19장은 세 사람을 특별히 다룬다. 첫 번째는 시므이(16~23)다, 다윗이 황급히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피난 갈 때 그 곁에서 돌을 던지며 저주했던 사람이다(삼하16:7). 하지만 다윗이 다시 권력을 잡자 180도 돌아섰다. 왕 앞에 납작 엎드렸다(삼하16:19).
또 한 사람은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이다(24~30). 혈혈단신에 절름발이, 자신은 은혜를 결코 잊은 적 없다고 한다. 왕이 예루살렘을 떠나실 때도 따르려 했지만 종인 시바가 못 가게 했고 자기를 모함했다며 그 증거로 왕이 쫓겨난 그 순간부터 수염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다고 한다. 금욕과 고난의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정황상 시바가 다윗을 속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시바도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이라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절반씩 나누게 한다. 므비보셋은 배신자 누명은 벗었지만 졸지에 재산이 반 토막 났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바르실래다(31~40). 바르실래는 다윗이 피난처에서 임시 정부를 꾸렸을 때 먹을 것과 필요한 물자를 지원한 큰 부자다. 흔히 부자들은 쿠데타가 일어나면 몸을 사리고 양다리를 걸치거나 눈치를 보는데 바르실래는 달랐다. 전적으로 다윗을 도왔다. 귀환 때 다윗이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바르실래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다윗이 이제는 자기가 대접하겠다고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했지만 자신은 나이가 팔십이고 죽을 날이 머지않아서 그런 부귀영화가 필요하지 않다며 정중히 거절한다. 대신 자기 아들 김함을 딸려 보낸다. 욕심부리지 않았다.
여하튼 귀환하는 왕의 모습은 아들 잃은 서러운 아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쿠데타 세력을 진압하고 권력을 되찾은 당당한 왕의 모습, 다윗의 귀환은 화려한 귀환이었다.
통합정책을 펴다
쿠데타를 진압하고 귀환하는 다윗 왕에게는 숙제가 있었다. 반란군 대부분이 북쪽 사람들이었고,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기에 그곳에 살던 유다지파 사람들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반란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란에 동참했던 지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던 민심 이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숙제였다. 그뿐이 아니다. 반란군 처리도 문제였지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총사령관 요압의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숙제를 풀어가는데 그 리더십이 탁월하다. 먼저 머뭇거리는 유다 지파부터 손을 댔다. 사독과 아비아달을 보내 유다지파를 자극해 적극적으로 다윗 왕을 위해 일하게 한다. 종친들이 앞장서야 하지 않느냐 그런 것이다(11).
숙제를 푸는 두 번째 해결책은 아주 파격적인 조치였다. 압살롬 반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마샤를 전군 총사령관으로 중용한 것이다. 반란군을 진압한 정부군의 총사령관 요압을 제쳐놓고 반란군의 총사령관, 즉 패장을 전군의 총사령관을 세운 것, 이건 반란군을 끌어안고 유다 지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요압이 실각한 셈이다. 이런 조치에 열 지파가 반발하고 세바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요압은 이 조치에 앙심을 품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도중에 아마샤를 암살한다. 한편 유다지파는 우리가 다윗의 종친이기에 당연한 조치라고 말하면서 국론이 이스라엘 열 지파와 유다 지파로 양분된다. 통합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 다윗이 기도한 기록이 없기에 다윗의 인간적인 결정이 아마샤를 죽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 평가는 아마샤를 전군의 총사령관으로 세운 것을 다윗이 하려 했던 통합이 아니라 더욱 큰 분열을 야기했다며 그래도 요압을 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물론 다윗이 아마샤를 임명하고 요압을 배제한 것이 요압이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고 아들 압살롬을 죽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비밀, 즉 우리야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앞으로도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 괴롭힐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했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아마샤를 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통합을 위한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결국 요압이 또다시 왕이 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아마샤를 죽여서 나라가 다시 분열되는 것 같았지만 이 또한 통합을 위한 과정이었다.
다윗이 누군가?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던 시므이도 용서한 사람이 아닌가? 아마샤를 중용한 것은 다윗의 통 큰 포용정책이었다.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의 지도자였기에 용서했고, 아마샤는 유다지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감하게 기용한 것이다.
이렇듯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너무 개별적이라 마치 다른 12개의 부족을 모아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학자들이 이스라엘을 열두 동맹체라고 규정할 정도다.
그래서 툭하면 개별적인 행동을 했지만 이 혼란한 지파들을 하나의 나라로, 하나의 민족으로 엮은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은 비로소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한 나라가 되었다. 다윗의 카리스마와 포용력이 통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윗은 이 통합을 위해 인내하며 용서했다. 적이라도 품었다. 사울을 품고 사울의 온 가족과 베냐민 족속을 품었다. 아브넬, 아마샤를 품었고, 압살롬도 죽이지 않으려 했다. 이런 리더십이 모래알 같은 열두 지파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윗의 통 큰 자세를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국기에 다윗의 별을 새겼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이스라엘로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도 하나가 되기 위해 통합정책이 필요하다.
장차 있을 왕의 귀환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자신의 예수 관련 연구서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라는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을 ‘왕의 귀환’으로 썼다. 왕이신 예수, 초림은 인간의 몸을 입고 종처럼 섬기기 위해 오셨지만 그 섬김 속에 구원이 있었다. 사실 구세주로 오셨던 것이다. 그 분의 사역의 절정은 십자가였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통합한 사역의 하이라이트, 십자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하나가 되게 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조롱하는 의미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붙였는데,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 되신 것이다.
장차 예수님은 왕으로 귀환하실 것이다. 하실 일은 ‘심판’, 다윗 앞에 나왔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심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심판에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소원인 영혼 구원과 제자 삼기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시상도 포함된다. 시상대에 서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불리며 칭찬과 영광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안절부절하며 두려움으로 심판받을 것인지는 우리의 삶에 달렸다. 재림하실 예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귀환은 오랜 여행에서 왕위를 받고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장사했는지 셈하듯 우리 인생의 열매에 대해 하나님께서 직접 묻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왕의 귀환 때가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이 되어야 한다. 계시록 22:20에 기록된 말씀인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