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의 기적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목회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대를 거스르는 고난과 역경 배고픔과 굶주림의 서러움을 느끼는 것조차도 사치라 죄악이라 생각이 들게 하는 종의 길 찢어진 천막 사이로 별빛처럼 비추는 낭만이 가득한 천막 교회에서 밤새워 부르짖던 눈물의 찬양들, 애끓는 심정을 가사에 실어 부르고 또 부르고 눈물로 지새우던 수많은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9년 2월 28일 신학교 3학년 신학생 정대기를 만나 한 생명, 한 생명을 찾아 구원하는 그 기쁨 어디에 비기랴. 영혼을 향한 열정으로 우리 두 사람은 뜻을 모아 기도로 준비하고 결혼 2주 만에 꿈에 부푼 개척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전라남도 순천이 어디에 붙었는지 한 번도 들어보지도 가보지도 않은 오로지 침례교단에 불모지라는 순천 땅, 장로교의 선교지로서 타 교파는 터를 잡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더욱이 침례교회 개척은 어느 누구도 시작할 엄두도 못 내는 전략 개척지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배경이나 도움의 손길 기도 동역자 물질 후원자 등 단 한 가지도 준비하지 않은 채 무모할 정도로 사명 의식에 불타 급하게 맨 몸으로 개척에 뛰어든 것이었다.
아직 재학 중이라 남편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어린이를 전도해서 데려다 새 소식 반을 열고 말씀으로 양육했다. 금요일 저녁 대전 신학교 기숙사에서 돌아온 남편은 토요일 새벽 4시부터 전도를 나갔다. 하다못해 신문 배달을 해도 4시에 나가는데 전도는 더 빨리 나가야 한다며 전도지를 돌리고 노방전도와 가가호호 방문 전도를 했다.
어느집 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달려드는 개에게 물려 피가 질질 흐르는 다리를 보고 놀란 집주인에게 전도를 하니 교회에 갈테니 어서 병원에 가시라고 해서 그제서야 병원에 가고 그 사람이 첫 어른 교인이 되는 에피스드도 있었다.
주일학교 예배가 시작되고 중고등학생으로부터 주일 11시 예배를 시작했다. 1979년 10월 전도를 받은 고등학생이 또 한 친구를 전도해서 아론과 훌처럼 남편의 목회를 보필했다. 그 중한 사람은 목사가 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아름답게 섬기고 계신다. 그렇게 학생들이 전도되어 믿음으로 성장해 가니 어려움 중에서도 늘 소망이 넘쳤다.
들판에 자라는 쑥을 뜯어 맛있는 간식거리를 해 먹으며 초라하지만 사랑으로 하나님의 꿈을 키워갔다. 쌀이 없으면 금식하라고 안 주시는가 보다 하고 금식하고 라면도 비싸니 조금 저렴한 국수와 밀가루로 근근이 끼니를 때웠다. 첫 임신을 했지만 굶기를 거듭하다 의식을 잃고 길 한복판에 쓰러져 집주인이 나를 발견해 데려다 눕히고 죽을 끓여 먹이니 의식을 찾았다.
첫 아이를 낳던 날, 밤새 산통을 겪어도 출산하지 못하는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살려냈던 은혜 입은 산파와도 같이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실 산부인과 원장님을 예비하셨다. 그리고 병원비 전부를 탕감해 주셨다. 의사 생활 40년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 하셨다.
개척을 위해 주택 집에 2층 방을 얻어서 제일 큰 방을 예배실이라 하고 남편이 쓰던 낡은 책상을 강대상이라 하고 어린아이 몇 명과 1년을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의 한계를 느낀 남편은 계약금을 빚내어 작은 땅 50평을 계약했지만 중도금도 빚을 내어주고 나머지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1년 후 그 땅에 쳤던 찢어진 천막마저 거두어 쫓겨나오던 날이 생각난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시듯 찢어진 천막을 어깨에 메고 질질 끌며 쫓겨나야만 했다. 빈 땅을 빌려 그곳에 찢어진 천막을 다시 치고 예배를 드렸다. <계속>
김창삼 사모
순천교회(정대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