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에 관해 멜랑히톤은 세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첫째, 율법은 이방 문화의 도덕률과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준수는 죄 된 세상에서 인간이 함께 사는데, 그리고 삶의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둘째, 신학적 측면에서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나게 한다. 셋째, 교훈적 기능으로 인간이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병을 알려주는 반면에 복음은 치료약’이라는 말로 멜랑히톤은 율법과 복음의 역할을 구분하고 있다. 율법과 복음은 동시에 선포돼야 하는데, 율법 없이는 죄를 알지 못하고 죄의 세력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칭의 : 멜랑히톤은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를 확고히 지지했다. 평생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였던 칭의론에 관해 멜랑히톤은 ‘오직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고 했다.
신앙 :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역사,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역을 믿는 것이다. 멜랑히톤은 신앙의 결과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신앙의 해체적 기능과 건설적 기능이다. 신앙은 모든 죄를 파괴하고, 공명심이나 질투나 방탕을 우리에게서 분리해 버리는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 구원의 희망을 우리 속에 건설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무조건적인 감사와 찬양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이웃 사랑과 소망이 우리 속에 생기게 된다. 멜랑히톤은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도움으로 여전히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반드시 성령의 사역이 이끄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 : 멜랑히톤은 세계의 역사가 교회의 역사이며, 구원의 역사라는 확장된 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 안에서 순수하게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시행되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은 거부했다.
침례 : 그는 침례의 의미를 회개와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을 때 침례는 그를 참된 회개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했다. 그는 침례를 구원의 중요한 성례로 봤으며, 침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죄의 용서가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침례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결합될 때 구원이 가능하다고 봤다.
성례 : 성례전은 복음 안에서 제정된 외적 표현으로 그 안에는 언약의 은혜가 있다고 했다. 성례전을 시행할 때는 신앙이 있어야 하며, 신약 성서적 성례전은 침례와 성찬이라고 했다.
성찬 : 성찬은 약속된 복음을 기억하는 것이며 신앙과 약한 양심을 강화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기억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신학통론’의 가치는 비텐베르크 종교 개혁을 통해 진행된 성서적 가르침을 최초로 조직화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 신학을 기초로 해 죄인인 인간과 은혜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서술 방식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집중했던 스콜라주의 서술 방식과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멜랑히톤은 ‘신학 통론’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강조한 루터의 신학에 더해 인간의 책임성과 도덕적 의무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문교회의 문에 게시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다. ‘95개조 논제’가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되며 독일 전체의 정치, 경제 문제로 확산되고 유럽으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해결책을 찾았다.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루터. 멜랑히톤, 칼슈타트와 가톨릭을 대표하는 에크라는 신학자가 연옥 교리, 면죄부 판매, 고해성사, 교황의 권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데 이 사건을 ‘라이프치히 논쟁’이라고 한다. 여기서 루터는 연옥개념과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신앙의 기초와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이라고 분명히 주장했다. 논쟁의 결과 교황의 수위권을 비판한 루터는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가톨릭과의 본격적인 대립과 투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독일 안팎에서는 루터의 지지자가 계속 증가하게 된다. 1521년 1월 21일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 칙령을 받았으나 칙령서를 불태워버리고 4월 16일 보름스 국회에 출두해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거절한다. 그해 5월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고 루터를 이단자로 선고해 그의 저서를 소각하고 지원 금지를 선포하는 ‘보름스 칙령’을 선포했다.
루터가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 이후부터는 교황의 파문과 황제의 명령으로 공적인 자리에 참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멜랑히톤의 역할은 독자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역할은 복잡한 신학 논쟁 및 종교적 대화와 신앙고백문의 작성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였으나 멜랑히톤의 노력으로 루터의 부재 시에도 종교개혁은 지속해서 확산될 수 있었다.
1529년 스파이어 회의에서 개혁파 사람들은 보름스 칙령의 실행에 저항하고 정치적 동맹 결성을 시작했다. 이들을 가톨릭 세력에 저항한 사람들이라 해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황제 칼 5세는 내부적 안정을 이루고 외적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종교 분쟁을 해결하기 원했다.
1530년 4월 황제는 아우구스부르크 제국 의회를 공시한다. 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통일성을 해치는 루터파가 돌아오도록 요구했고, 황제는 개신교 영주들에게 신앙을 변론할 신앙 고백을 제시하기를 요청한다. 그래서 작센의 선제후는 멜랑히톤 등 루터파 신학자들에게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한다. 1520년 보름스 회의에서 추방 명령을 받은 루터를 제외한 작센의 신학자들은 함께 모였고, 멜랑히톤은 기존에 작성됐던 조항들을 중심으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멀리 있는 루터와 상의했다. 루터는 멜랑히톤에 의해 작성된 신조가 너무 평화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다음과 같은 말로 수용했다.
“나는 멜랑히톤의 변명을 읽었다.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더 잘 만들도록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순응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부드럽고 조용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멜랑히톤은 루터 신학을 집약해 28개의 조항으로 신앙 고백서를 정리했다.
이 고백서는 루터교의 교리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로마 가톨릭과의 신학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밝히며 동시에 교회 일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역할을 하였다. 최초에는 라틴어로 작성됐고 몇 년 후에 독일어로 번역된다.
신앙고백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겠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1∼21조)은 개신교의 주요 교리들을 설명하며, 두 번째 부분(22∼28조)은 가톨릭교회의 오용과 개혁 요구 사항을 지적한다. 이 고백서는 원죄, 하나님, 이신칭의, 교회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 교회의 직분, 성찬식, 침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반대, 수도원적 맹세 폐지 등이 그 내용이다. 멜랑히톤은 이신칭의 입장에 있었고, 공적인 행위보다 믿음을 강조하여 루터주의 복음적 신앙을 표현했다. 멜랑히톤은 교회의 통일을 바라며 로마 가톨릭을 자극하는 내용은 가급적 피하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통점에 중점을 두었다. ‘미사’ 용어를 계속 사용했고, 교황 수위권의 문제, 성자 숭배, 연혹설, 화체설, 만인제사장설 등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는 삭제했다.
내용이 타협적이라 일부 개혁 군주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종교 개혁의 신앙적 핵심은 담겨 있었다. 루터와 대부분의 루터파 제후들은 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했다. 황제와 가톨릭 측은 이 신앙 고백을 거부하고 가톨릭과의 연합을 명령했으나 루터파 신학자와 제후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황제는 루터파의 신앙 고백을 받아주게 된다. 1530년 6월25일 아우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이 신앙고백이 낭독된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 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한 문서로 종교개혁 역사에서 중요한 지표이다. 또한 이 문서는 루터파 교회의 신학 교육과 교리 체계의 기초를 마련했다.
멜랑히톤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업적은 종교개혁 신학의 체계화와 교육 개혁이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적 사상을 정리하고 이를 조직화하고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멜랑히톤은 활동 초기부터 학교를 통한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교육적 열정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해 ‘독일의 스승’이라 불리고 있다. 교육을 통해 종교 개혁의 사상을 확신시키고 후대 신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인내와 관용의 태도로 종교개혁의 합의를 이끌어내었고 개신교 신학을 정리하여 개혁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신학과 저서들은 오늘날까지도 개신교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끝>
이은화 사모
와초교회(임영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