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인(2)

  • 등록 2025.02.11 16: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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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11

전치규 목사(全穉圭, 1888~1944)
전치규는 1888년 1월 5일 강원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리에서 신동으로 불렸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고을에서 한학자로 활동하며 존경을 받았다. 20세(1907년) 때 영동구역 울진에서 활동하던 손필환 교사(전도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했고(이때 전치주, 남규연 등 8명이 함께 개종), 이후 울진지역에 행곡과 척동에 교회가 세워져 부흥함에 따라 울진구역이 설정됐다. 학문이 뛰어났던 전치규는 개종 직후 펜윅의 비서로 발탁돼 원산총부로 갔다. 그는 총부의 사무를 보는 한편 펜윅 밑에서 6년간 성경을 공부했으며, 조력자로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펜윅이 한글로 번역을 하면 어휘를 다듬고 바로잡는 일은 그가 담당했는데, 먹을 갈아서 일일이 붓으로 썼고, 한 번 쓴 것을 다시 교정을 보고 나면 또 고친 부분이 많아 다시 써야 하는 등 5~6번 기록하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신약성경 전체를 쓰는데 며칠이 걸렸는데, 이로 인해 밤을 새는 건 다반사였으며, 그의 손이 부르틀 정도로 붓으로 기록했다. 이런 정성을 통해 나온 성경이 바로 원산 번역 ‘신약성경’으로, 그는 이를 다 손으로 기록한 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신약성경과 함께 256페이지의 ‘복음 찬미’도 발간했는데, 이 모두 수 많은 날을 뜬눈으로 밤을 밝히면서 이루어낸 결실이었에 이들이 발간될 때 전치규는 감사와 감격이 넘쳤다고 한다.


1912년 7차 대화회(총회)에서 전치규는 허담, 안대벽과 함께 교사(전도사)로 임명받았고, 1917년 간도의 종성동에서 개최된 12차 대화회에서 노재천, 한봉관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치규 목사는 총부의 총무 겸 펜윅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펜윅으로부터 “순종의 아들”이라 칭찬을 받을 정도로 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한번은 펜윅 선교사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를 주면서 “이것을 밭에 나가 거꾸로 심으라”고 했다고 한다. 모든 학생이 무를 거꾸로 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 바로 심었는데 전치규 목사만은 선생님 말씀에 순종해 거꾸로 심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펜윅 선교사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종은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성품과 강직한 학자로서의 인품을 지녔다. 더불어 몸에 밴 겸손함과 원만한 성품까지 겸비했다. 1919년 14차 대화회에서 전치규 목사를 원산구역의 교단총부를 중심으로 충청남도과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며 순회사역을 했다.


전치규 목사는 엄격한 자녀교육으로 유명하다. 가훈을 정해 한치도 흔들림 없이 자녀들을 양육했는데, 첫째로 너희들은 먹고 입고 쓸만 하거든 더 이상 바라지 말라. 둘째로 사회생활에 있어 이해관계로 인해 문제가 생기거든 언제든지 손해를 보는 편에서 해결하라. 부산교회 안수집사였던 그의 아들 전인철 집사에게 편지를 보내 “너는 절대로 뒷거래를 하지 말 것이며 저울 눈금을 속이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는 평소에 전 목사의 생활철학으로 실천했던 것으로, 아들에게도 이런 삶을 권유했던 것이다.


1924년 19회 대화회에서 전치규 목사는 3대 감목(총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17개 구역에 11명의 구역 전담 목사를 임명해 조직을 재정비하는 한편 몽골지역까지 선교 영역을 확장하는 등 교단을 새롭게 발전시키는데 앞장 섰다. 전치규 감목이 제3대 감목을 마친 후 1934년 김영관 목사가 4대 감목이 됐다. 감목 직에서 내려온 전치규 목사는 이전과 다름없이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전도 사역에 매진하였고, 신자들을 정성껏 돌봤다.


일제가 신사참배문제로 혈안이 되어있던 1938년 웅기교회 ‘달편지’ 발각사건이 발발했는데, 이때 일제는 전치규 목사를 원산경찰서로 긴급 소환했다. 이는 ‘달편지’에 감목이 일제의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하지 말라는 광고가 실렸기 때문이다. 이때 김영관 감목·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목사·노재천 목사 등도 함께 소환됐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결같은 답변을 하자 일제는 그들을 가둔지 3개월 만에 검찰에 송치했고,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됐다. 이후에도 더 이상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자 일제는 전치규 목사를 비롯해 이종덕 목사·노재천 목사에게 기소유예를, 김영관 감목·백남조 총부서기는 3년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1940년대 들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어 교단이 어려움에 처한 가운데, 1942년 6월 10일 원산의 헌병대가 이종근 감목을 불시에 체포한 후 심문을 통해 탄압의 꼬투리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실패하자 더욱 독이 올라서 다음 날 강원도 울진에서 활동하던 전치규 목사를 긴급 체포했다. 이는 그에게서 교단탄압의 원인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전치규 목사는 이미 1938년 웅기교회 ‘달편지’ 발각사건으로 인해 기소유예를 받은 상태였다. 당시 그는 54세의 나이였고, 일제의 탄압과 고문을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웠다. 1942년 6월 11일에 체포된 이래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에 이르러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15일간 재판을 받은 결과 체포된 32명 중 전치규 목사를 비롯한 이종근·노재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되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전치규 목사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는데, ‘예심청구서’에는 그의 범죄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2 피고인 전치규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익히고 성장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메이지 42년(1909년)경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됐고, 타이쇼 4년(1915년) 목사가, 타이쇼 13년(1924년) 감목으로 선임되고, 쇼와 9년(1934) 사임 이후에는 안사로 천거되는 동시에 원로 겸 원산구역 명예 목사가 되어 현재에 이른 자이다. 첫째, 쇼와 16년(1941년) 8월 중 감목인 피고인 이종근의 소집을 받아 전게 제일의 기록내용의 협의를 했다. 둘째, 쇼와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 17년(1942년) 1월 상순경까지 매월 2회 평균 전 총O부에서 예배를 할 때 신자 김중생 외 약 30명에게 전기와 마찬가지의 설교를 했다(앞서 이종근 목사의 범죄 사실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및 천년왕국의 출현을 기원한 내용의 설교”를 말함). 셋째, 쇼와 16년(1941년) 8월 중 강원도 통천군 통천면 서리 소재 원산구역 내 서리교회에서 최명선 외 20명에게 침례를 베풀고 이를 교인으로 했다.”


예심에 회부된 다른 교단 지도자들과 함께 수감된 전치규 목사는 혹독한 일제의 고문과 열악한 감옥 환경으로 인해 날로 쇠약해 갔다. 그러다가 1944년 2월 13일 그는 옥고와 영양실조 그리고 여독에 시달리던 가운데 형무소 안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교단 대표 32인 중에, 특히 예심에 회부된 9인 중에 최초로 옥중에서 순교한 것으로, 당시 그는 56세였다. 그가 남긴 말은 “아버지여, 땅에 남은 교단과 식구들을 부탁드리오니 보살펴 주옵소서”였다고 한다.


전치규 목사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일제는 그의 장례식이 반일의 빌미가 될 것을 우려해 시신을 내어주지 않아 유족들을 더욱 애통하게 만들었고, 전국에서 성도들이 원산까지 달려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렸다. 전치규 목사가 순교한 지 이틀 후인 1944년 2월 15일 이종근 감목을 제외한 7인(노재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은 병보석으로 임시출옥했는데, 이때 그의 시신이 가족에게 인도됐고, 펜윅 선교사가 묻힌 원산에 묻혔다. 슬하의 자녀로 전인철(부산교회 안수집사, 침례병원 초대원무과장), 손자 전대식(서울교회 안수집사)이 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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