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부드러운 온유함이 강한 것을 이긴다. 1880년대 일본에서 가노 지고로는 유도를 창시했다. 유도라는 무술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유도(柔道)는 ‘부드러운 길’이라는 뜻으로 상대의 힘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상대보다 더 큰 힘으로 맞서며 공격을 가하는 대신, 상대의 힘을 활용하면서 교묘하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상대가 당기면 나도 같은 방향으로 민다. 상대가 밀면 나는 당긴다. 가노는 이것을 정력선용(精力善用), 즉 ‘최대의 효율, 최소의 노력’으로 설명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유도 경기를 보면, 처음에는 유도가 이름처럼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이 든다. 유도 선수들은 위로 들리고, 내동댕이쳐지고, 움직이지 못하게 바닥에 꽉 눌린다. 유도에는 격렬한 활동과 노력과 힘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아래에는 부드러운 길이 있다. 잘 살펴보면 한 선수의 공격이 상대 선수의 전술로 변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최대의 효율과 최소의 노력이며 유도다.
온유함과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함을 이기는 힘이다. 부드러움은 유연성을 통해 변화에 적응할 수 있으며,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헬라어에서 “온유”를 “프라우스”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온유를 설명할 때 “happy medium”라고 했다. “happy medium between excessive anger and excessive angerlessness.”
그는 이 온유를 설명할 때, “내가 너무 과도하게 화를 내는 것과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보아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무감각 사이의 한복판”이라고 설명했다. 어떤 헬라어 학자는 성경에 나타난 온유의 개념을 이런 문장으로 설명했다. “온유란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힘이 잘 조절되어 그의 인격 속에 구현되는 덕이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조련사가 야생마를 훈련한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서 야생마가 이제 사람들에게 위협이 안 되고 잘 길들여 졌을 때에 “프라우스” 즉 “온순해졌다”는 단어를 썼다. 이 온유는 바로 힘이 조절됐을 때에 사용했다.
잠언 16장 32절에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을 수 있는 힘’ 이야말로 ‘참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조절할 줄 아는 힘, 이것이 성경이 말한 “온유”라는 개념의 핵심이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온유”을 다를 말로 정의할 때 “다스려진 힘”이라고 했다. 이 힘만이 인류를 복되게 할 수 있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크게 기여했던 마틴 루터 킹의 스승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그는 간디에게서 비폭력운동의 지혜를 배웠다. 인도 사람들은 간디가 평생을 걸고 지향했던 한 가지 중요한 정신을 가리켜서 “사티아 크라아”, 곧 ‘진리를 지키는 힘’, ‘정신의 힘’이라고 했다. 간디가 인도의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시킬 때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외쳤던 메시지가 있다. “여러분, 영국인을 사랑합시다. 그들을 폭력으로 대하지 맙시다. 우리는 제도와 싸우고 있는 것이지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방법과 태도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인 것이다. 미움은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사랑만이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영국인이 우리를 매질한다면 그 매를 맞읍시다. 그들이 우리를 감옥에 집어 넣는다면 감옥에 기쁘게 갑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사랑합시다.”
간디는 인도에 위대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그것은 그의 정신의 승리, 그것은 “온유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성경에서 보면, 온유하고 부드럽고 착하고 순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예수님의 전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성전앞에서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전을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진노하셔서 상을 뒤업어 버리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너희가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구나.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하시면서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진노하셔야 했을 때 진노하셨으며, 참아야 할 때 참으셨다.
우리는 지금 거룩한 분노를 상실해 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복음을 위한 분노가 사라지고 있다. 진리에 대해 타협하면서, 개인적인 문제는 쉽게 열받고 화를 낸다. 예수님은 반대였다. 십자가의 고난을 우리 주님은 참으셨다. 마치 털 깍는 자 앞에서의 양처럼, 고난을 참으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요”라고 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는 분노하셨지만, 죄악을 위해서는 분노하셨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분노하지 않는 분이셨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가? 자신이 약간만 불리하고, 자신의 이익에 약간만 침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화를 내면서 우리의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서는 침묵하고 타협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온유한 자가 될 수 있다. 극한 대립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에는 과연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사람을 죽이는 강한 리더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온유한 리더가 필요한 때이다. 오늘 하루의 삶이 진정으로 온유한 자가 되어 나라와 교회를 살리는 리더로써 쓰임받기를 소원한다.
최천식 목사
약속의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