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담긴 신학 산책>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앙 - 6

  • 등록 2013.05.31 13: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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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의 선봉에 서있었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전파자로 변화된 사건을 세 번이나 전달함으로써 사울의 체험과 변화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서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혹은 큰 빛이 비취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과 함께 아나니아를 통해 부활의 주님을 다시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내적인 변화의 요소가 강조됐다.

 

사도행전 26장에서는 그의 체험담이 로마 총독 베스도와 유다 왕 아그립바 그리고 여러 고관들이 배석한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여기서도 그의 체험은 앞의 두 번의 묘사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지만, 한 가지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그에게 주시는 소명의 말씀이 아나니아를 통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직접 전달되는 부분이다.

 

바울의 변명은 유다 왕으로서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을 지목하여 그에게 자기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바울은 그가 전에는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분파인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는 것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그가 심문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울은 그 자신도 전에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여러 가지로 박해했으며 외국 성에까지 가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대제사장들의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게 됐다는 것으로 진행한다.

 

바울은 그가 부활의 예수를 만나던 시각을 정오라고 말한다: “왕이여 때가 정오가 되어 내가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26:13). ‘정오라는 시각을 말할 때 사도행전 22장에서는 정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오쯤 되어로 묘사한 반면, 여기서는 정오라는 단어 자체는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하루의 중간에로 표현했다.

 

하루의 중간시각인 정오는 사도행전에서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시각으로 제시된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환상을 보던 시각이 정오였으며(10:9), 그는 그 환상을 통해 닫혀가는 유대인 선교를 넘어서서 이방인 선교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전도자 빌립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왔다가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무장관을 만나 복음을 전하던 시각도 정오였다(8:26). 한글 성경에는 빌립에게 하신 성령의 말씀이 남쪽으로 향하여로 되어 있는데, 그 어구는 정오에로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정오라는 시각은 복음 전파의 중요한 전환기에 복음의 일군들에게 복음전파 사역의 방향을 바꾸도록 지시하는 성령의 계시가 나타나던 시각이었다. ‘정오는 하루 중 태양 빛이 가장 강렬하게 비취던 그 시각에 성령에 의한 계시의 빛이 복음의 일군들에게 강렬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시각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 때 자기에게 비추인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의 체험을 ’(9:3) 혹은 큰 빛”(22:6)으로 표현했던 것보다 더 선명하게 이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였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는 표현은 햇빛을 비유어로 사용한 하나님의 계시 행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렇게 완고하게 바리새파 전통을 고수하며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던 사울의 내면을 일거에 강타하여 부활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만들었던 강력한 계시의 역사를 나타낸다. 바울은 이 체험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의 요소를 그의 서신들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2);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바울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사건(1:16); 부활의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여러 증인들에게 나타내셨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나타내신 것(고전 15:8); “예수 우리 주님을 본(고전 9:1);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사건(고후 4:6).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 복음의 확신을 주었고 복음전파의 담력을 받게 했다. 그래서 그는 왕과 총독과 고관들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담대히 그의 체험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일군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러한 빛의 역사가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서는 사울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반면, 여기서는 바울과 함께 그의 동행들에게도 임한 사건으로 제시된다(26:13). 그래서 그가 땅에 엎드러진 것도 앞에서는 사울이 개인적으로 엎드러졌다고 묘사된 반면, 여기서는 그와 함께 그의 동행들까지 우리가 다 엎드러졌다라고 묘사된다(26:14).

 

바울은 여기서는 또 그가 들은 주님의 음성을 히브리 말로들었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들은 것 자체가 바울이 아람어(히브리 말)로 들은 것을 제시하는데(9:4; 22:7), 여기서는 그 언어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을 전달함에 있어서 바울은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는 없는 내용을 소개한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이 구절은 헬라인들에게 잘 알려진 격언으로서 내게 대한 네 반항이 너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며 그것이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농촌 생활에 기초한 이 격언은 기독교인 박해의 선봉에 서있던 사울의 내면에 많은 혼란과 고통이 있었던 것을 암시한다. 한편으로 그가 가진 바리새파적 전통에 기초하여 확신을 갖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에 서있었으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주장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그의 마음에 혼란과 고통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사울의 내면세계의 혼란과 고통은 그가 등장하기 시작한 스데반 순교 사건에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치던 자들의 옷을 지키면서 그 사건의 핵심 인물로 제시된다(7:58).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수용할 수 없었으며 그 설교를 들었던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분노하게 되었고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지키면서 그 사건의 증인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면서도 주 예수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하던 스데반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줬다.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는 사울의 종교적 확신을 뒤집어엎는 것 같은 충격을 줬으며 그래서 그는 더 분노하면서 박해의 선봉에 서게 됐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면 할수록 그의 내면을 찌르는 가시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활의 주님의 음성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럽던 사울의 내면세계의 정곡을 찌르면서 그로 하여금 바리새파 전승을 넘어서는 부활의 존재와 부활의 세계가 존재함을 나타낸 것이다.

 

바울은 그 체험의 현장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부활의 예수께로부터 직접 전달된 소명의 말씀을 전달한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26:16-18).

 

일어나 네 발로 서라는 명령적 말씀은 예언자 에스겔의 소명 사건에서 소명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다(2:1). 이 말씀은 이제 사울이 부활의 예수를 위해 복음의 일군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사명을 전달한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사건이 부활현현 곧 부활의 예수께서 나타나신 계시 사건인 것을 말해준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울에게 계시하신 목적은 그가 부활의 예수를 본 일과 주님께서 앞으로 그에게 나타내실 일들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부활의 예수께서 그를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어둠에서 빛으로 또 사단의 권세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물론 그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부활현현의 체험은 사울로 하여금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게 만들었으며 그가 갖게 된 부활신앙은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확신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이 체험은 나아가 그로 하여금 그가 체험적으로 깨닫고 확신하게 된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히 전파하게 만드는 사명감과 담력을 소유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이 체험에 기초하여 복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전파자요 선교사이며 교회의 개척자가 된 것이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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