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는 과거 가톨릭의 박해 역사가 있는 곳이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수많은 성당이 세워진 가톨릭의 성지라고 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나가사키는 통상적으로 익숙하고 친숙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나가사키 하면 나가사키 짬뽕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짬뽕이란 말은 나가사키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근거 없는 낭설에 가깝다. 분명한 것은 짬뽕은 일본어과 일본에서 유래됐다. 19세기 푸젠성(복건성) 출신의 천핑순이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했는데, 푸젠성의 지방 요리인 탕육사면(돼지 뼈와 닭 뼈 육수에 파, 버섯 등 야채와 면을 넣은 요리)에 자기 나름대로 해산물과 어묵을 추가해 변형한 면 요리를 만들었다. 1899년 만들어진 면요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중국면이나 중화면으로 불렸다.
그러다 당시 일본인들이 여러 가지가 섞인 음식이라는 의미로 일본어 명사 ‘섞음’(지금은 사용하지 않음)이라는 ‘찬폰(ちゃんぽん)’으로 이 면 요리를 부르게 됐다. 또한 중국어 동사 ’밥을 먹다’의 ‘츠판(吃饭)’의 푸젠성 사투리가 일본인들에게는 ‘찬폰(ちゃんぽん)’처럼 들렸기에, 결국 이 면 요리의 이름은 ‘찬폰’으로 불리게 됐다. 이 찬폰이 한국식 발음으로 짬뽕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천핑순이 개업한 가게인 ‘시카이로(사해루)’는 지금도 나가사키에서 대를 이어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또한 나가사키는 카스텔라(15~18세기 신항로 개척 시대 혹은 대항해시대의 뱃사람 주식)도 유명한데, 일찍이 나가사키가 서양과 교역을 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49.5km 거리에 있는 대마도(쓰시마)는 나가사키(현)에 속해있는 섬이다.
이 밖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나가사키가 우리에게 친숙할 수 있는데, 가장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을 맞은 도시라는 것이다. 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했을까?
이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핵폭탄과 원자폭탄은 같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핵폭탄과 원자폭탄이라는 용어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알지 못하고 같은 말로 사용하거나 혼용해서 사용한다.
결론적으로 핵폭탄과 원자폭탄은 동의어가 아니다. 핵폭탄은 핵분열 또는 핵융합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다. 따라서 ‘원자폭탄, 수소폭탄, 중성자탄’은 모두 핵폭탄의 종류들이다.
첫째, 원자폭탄은 핵분열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인데, 여기서 중요한 핵분열 반응은 우라늄 -235 또는 플루토늄 –239 같은 중원소가 중성자의 충격으로 분열하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폭발은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파괴력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폭탄들이다.
둘째, 수소폭탄은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무기다. 수소폭탄은 핵융합을 이용하는데, 이는 두 개 이상의 가벼운 원자핵이 결합해 무거운 원자핵이 되는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는 열핵폭탄이다. 기폭 단계가 여러 단계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폭발이 그 전 단계의 폭발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단계 열핵폭탄’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2차 폭약의 핵융합 반응의 재료가 수소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소폭탄이라고 부른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원자폭탄에 비해 위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에 핵보유국(핵 확산 금지 조약, NPT 기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및 북한(6차 핵실험으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이 실전 배치한 핵무기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수소폭탄이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 원자폭탄은 제작 단가나 기술적인 가치가 떨어져 모두 퇴출당했다.
셋째, 중성자탄(강화 방사능 무기)은 소형화가 가능한 핵무기다. 수소폭탄에 베릴륨과 리튬을 둘러싸서 헬륨 원자핵의 에너지를 고에너지 중성자선으로 변환하는 핵무기의 일종이다. 핵폭탄의 기술 난이도는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의 순서대로 개발된다.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 투하 지점에 대한 최초 논의는 1943년 5월에 있었으나, 당시 원자폭탄이 완성된 단계도 아니었으므로 체계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독일보다는 일본에 투하한다는 대전제 정도만 합의됐으며,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원자폭탄 완성이 거의 가시권에 들어온 1945년 4월에 시작됐다.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이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육군 소장에게 원자폭탄을 투하할 도시를 선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그로브스 육군 소장은 주요 책임자(오펜하이머, 존 폰 노이만 등)들을 모아 ‘원자폭탄 목표 선정 위원회’를 조직해 한 마디로 ‘어디를 공격해야 잘 공격했다고 소문이 날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목표 선정 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3가지 기준을 정했다.
1. 지름 3마일(4.8km) 이상이고 주요 목표물이 있는 도시
2. 원자폭탄 폭발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도시
3. 1945년 8월까지 폭격받을 계획이 없는 도시
하지만, 당시 일본에 더 이상 폭격할 만한 대상 도시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도쿄를 비롯한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 그럴듯한 군사거점이 있는 일본의 주요 도시는 이미 미 공군의 제21 폭격기 사령부에서 출동한 수백 대의 B-29(4년 동안 4,000대 생산)들이 들이닥쳐, 소이탄과 고폭탄을 가리지 않는 공습으로 이미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백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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