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에 들어갔다가 정치범으로 사형 장까지 가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참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었다. 처형당하기 직전 황제의 감형 조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시베리아 유형, 수용소에 4년을 갇혀 지냈다. 그런데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또 출소 후의 건강을 위해 노동에도 정을 붙이려 노력했고, 장차 쓸 소설 소재를 위해 범죄자 관찰도 열심히 했다. 결국 나중에 유형 생활 수기인 장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외에도 4대 명작,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범죄소설을 쓴 범죄 문학의 마법사가 된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것이다.
30대 대부분을 시베리아에서 보낸 도스토엡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도 삶이 고달팠다. 형과 함께 잡지 사업하다 빚만 잔뜩 지고 형이 죽자 그의 빚까지 다 떠맡아 평생을 빚에 시달렸고, 폐결핵으로 7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만났던 아내를 잃고, 자신도 간질, 폐기종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그러나 매 순간이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면서도 ‘생을 선물’이라 여기며 지치기는 커녕 열심히 작품을 써서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다윗도 참 힘들고 고달픈 세월을 보냈다. 죽음의 위기도 많았다. 본문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지만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은 결국 승리자가 된다.
위기를 맞다
다윗이 아기스 왕의 신하들의 반대로 사울과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데 전선에서 사흘 만에 시글락에 돌아와보니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위기가 또 기다리고 있었다. 다윗의 주력 부대가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이 침략해 성읍을 불사르고, 소와 양떼를 약탈하고, 다윗과 군인들의 가족들을 잡아간 것이다.
완전 쑥대밭, 어릴 적부터 실패를 모르던 다윗이 당한 공식적인 첫 패배다. 아내들과 아이들을 방치하기라도 한 듯 망명생활도 서러운데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이 되자 다윗도 큰 충격을 받는다.
백성들과 함께 목놓아 운다. 넋이 나갈 정도로 대성통곡한다(4절). 처자식 방치가 너무 아픈 결과를 만들었다. 마치 직무유기한 느낌이다. 그래서 더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문제는 다윗도 두 아내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이 잡혀갔는데 백성들의 슬픔과 비탄이 비난과 분노로 바뀌며 다윗을 돌로 치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6).
울다 지쳐서 이성을 잃은 걸까? 감정이 폭발했다. 백성들이 갑자기 화살을 다윗에게 돌렸다. 환난당했던 자, 빚졌던 자, 마음이 원통했던 자들이었지만 새로운 꿈과 비전으로 꽤 친밀한 공동체가 되었지만 처자식을 잃고는 돌변했다.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 신뢰가 분노로 폭발한 것, 다윗은 다급해졌다.
절체절명의 위기다.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과 인기를 토대로 백성들을 이끌어왔는데 한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 됐다. 그런데 다윗은 성난 부하들 앞에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말로 설득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뜻을 묻는다(8).
과연 위기관리의 달인답다. 실패를 디딤돌로 삼고 일어난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에봇을 입은 제사장 아비아달을 통해 말씀하셨다. “쫓아가라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엔돌의 무당을 찾아갔던 사울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망명 중에 패배당한 초라한 다윗의 하나님께 묻는 태도에 즉각 반응하셨다.
확신을 얻은 다윗은 급히 아말렉을 뒤쫓아 간다(9). 600명의 군사와 먼 거리를 너무 급하게 추격하다 보니 지친 사람들이 나왔다. 낙오자 200명은 쉬게 하고 400명만 이끌고 간다. 그러나 이미 3일 전에 달아난 아말렉, 인공위성으로 위치 추적을 하던 시대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찾는 게 쉽지 않다. 아니 막막하다. 하지만 역사의 추는 이미 다윗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돕는 자가 예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 네비게이션을 준비해주신 것, 아말렉에 종으로 팔렸다가 병이 들어 쓸모없다고 버려진 애굽인이 다윗의 군대를 아말렉 군대들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준다. 하나님이 위기 가운데도 또 함께 해주신 것이다.
아말렉을 급습하다
다윗은 아말렉 진영 근처까지 추격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은 승리에 도취해서 축제를 벌이고 있다(16). 다윗은 기다렸다가 그들이 잠든 새벽에 급습, 다음날 저물 때까지 거의 전멸시키며 대승한다. 마치 매가 쥐를 낚아채듯 삽시간에 적진을 휩쓴 것이다.
그리고 두 아내를 포함하여 빼앗겼던 모든 것을 도로 찾는다. ‘도로 찾았다’는 표현이 연달아 3번 언급될 정도로 강조되고 있다(18, 19, 20). 이에 더하여 수많은 전리품도 다 다윗의 소유가 된다. 위기가 기회가 된 것, 다윗은 일거에 큰 재물을 소유한 유력한 자로 우뚝 선다.
다윗의 승리 못지않게 전리품을 처리하는 태도가 돋보인다. 전투에 참여했던 400명 중 일부가 후방에 남았던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성경은 속 좁은 이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 들’(22)이라 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인 산적이나 의적 정도 였기 때문일까? 그들은 전투에 참여하여 노략한 만큼 자기들끼리만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다르다. 다윗은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른다. 모두가 한 공동체라며 이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동일한 분배가 마땅하다는 것이다(23~24). 여기서 다윗은 낙오했던 200명을 ‘소유물을 지켰던 자들’이라 표현한다. 사실은 낙오하고 쉰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존중해 주는 다윗이 참 멋지다.
쪼다들과는 너무 다르다. 전리품 독식은 안 된다는 생각, 그래서 벧엘부터 헤브론까지 13개 성읍에 전리품을 보냈다(26). 사실 이 남부 지역은 아말렉에 의해서 탈취를 당했기에 다시 돌려받은 셈이다.
다윗은 이런 처사로 유대 남부 지역의 민심을 얻고,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 전역이 블레셋의 영향력에 들어갔을 때 유대의 지도자가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만 자기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나눌 줄 알았기 때문이다. 훗날 전리품을 보냈던 헤브론은 다윗이 최초로 왕국을 선포하고 왕으로 즉위한 곳이 된다. 다윗은 이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유대를 다스린다. 나눔으로 민심을 얻은 곳이기 때문이다.
사울이 죽다
다윗이 승리한 날 사울은 최후를 맞았다. 아벡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패하면서 사울은 요나단을 포함한 세 아들과 같은 날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31장은 사울의 몰락 장면, 자세히 서술됐다.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장렬하고, 아름답고 영웅다운 죽음이지만 비참한 죽음으로 평가를 받는다. 다윗과의 관련 때문이다.
사울이 죽어야 다윗이 왕이 되는데 활에 맞고 중상을 입은 사울, 인생의 마지막 태양을 보며 사무엘서 전반부를 가득 채운 긴 인생이 끝나갈 때 사울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이스라엘인의 손에 최후를 맞겠다고 무기 든 시종에게 자기를 찌르라고 명령한다.
차마 자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종은 차마 왕을 찌를 수 없어 머뭇거리자 사울은 결국 자기 칼로 자결한다.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장수로서 명예로운 방식을 취한 것이기는 하나 왕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다윗에 대한 미움 때문에 생을 낭비한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사울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았다. 그저 자신의 명예만 생각한 사람, 결국 사울은 기대와 달리 명예는커녕 아들과 함께 벧산 성벽에 못 박힌 채 시신이 조롱을 당한다. 목이 잘리고 그의 갑옷은 전리품으로 아스다롯 신당에 전시된다. 죽으면 지하세계의 음부에 내려가기에 시신은 정중하게 땅에 묻어드려야 한다는 중동인들의 생각과 달리 사울은 죽어서도 너무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외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생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의 나하스에 의해 고통당할 때 그들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야베스 사람들이 일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km 떨어진 벧산까지 가서 사울과 그 아들의 시신을 탈취해 온다. 그리고 간이 화장을 하고 야베스의 에셀 나무 아래에 그 뼈를 정중히 묻어드리고 7일 동안 금식을 한다. 한마디로 애곡한 것, 그들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사울의 태양은 서산에 내려앉고, 다윗의 태양이 중천에 뜬다. 사울의 마지막이 비참한 것과 달리 다윗의 새 시대가 활짝 열린다. 잊지 말라. 인생은 끝이 좋아야 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 그래서 평안히 임종하는 복, 호종명(好綜命)의 인생이 돼야 한다.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