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차장이 이번 제주도 출장에서 선교역사탐방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발송작업이 끝나고 이어진 회의에서 사장님의 지시에 마음이 급해졌다. 제주도는 대학생 시절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CCC에서 “러브제주2008”이란 이름으로 여름수련회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전혀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 사장님이 꼭 침례교 선교역사가 아니어도 된다고 말씀해주셔서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안내해주는 사람 없이 혼자 가는 초행길, 어찌해야 할지 몰라 타사 교계기자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니 제주 순례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순례의 길은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관광공사, 제주CBS가 함께 제주 관광시장의 틈새 공략 및 관광자원화를 위해 개설한 코스이다.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는 것이었는데 국내에도 이러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구미가 당겼다. 제주 순례의 길은 총 4코스로 순종의 길(14.1㎞), 순교의 길(23㎞), 사명의 길(21.4㎞), 화해의 길(11.3㎞)이 있었다. 은혜의 길이라는 코스도 있는 듯 했지만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이번 제주행에서 체험할 코스로 순교의 길과 사명의 길은 너무 긴 것 같고 순종의 길이 숙소와 그나마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그곳으로 결정했다. “산악을 평지처럼”이라는 구호로 강원도 산들을 정복했던 2사단 17연대 산악보병부대 출신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산길도 아닌 평지를 걷는 것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후술하겠지만 그것은 너무도 큰 오산이었다.
제주선교의 역사
다음으로 제주선교역사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구입했다. 책은 박용규 교수가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저술한 “제주기독교회사”를 선택했다. 책에 따르면 제주 선교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결실로 그 이듬해인 1908년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로 파송을 받으며 제주 기독교회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당시 오지선교를 모토로 삼았던 침례교가 제주도는 발을 내딛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찌됐든 이기풍 선교사의 파송으로 제주도에 점차 예배당이 생기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제주 선교에 대한 침례교의 기록은 많지 않았다. 감리교와 성결교가 하나의 챕터로 소개되는 반면 침례교는 한 문단으로 소개가 끝나 있었다. 1968년 표선리에 표선제일교회가, 1969년 제주시에 오라교회가 이름을 올리며 침례교의 제주선교가 시작됐다. 1966년 15명의 교인들이 침례교선교회와 연결돼 그해 침례교회를 제주에 설립했다고 하는 내용도 있었다. 참고로 현재 우리 총회 주소록(2022년 4월 4일 기준)에 등록된 제주 소재 침례교회는 13개이다.
탐방의 시작
조식을 든든히 챙겨 먹은 후 순례의 길 첫 관문인 금성교회에 도착했다. 빨간색 벽돌 건물에 큼지막한 글씨로 금성교회라고 쓰여진 예배당에 도착하자 드디어 탐방의 시작이라는 사실에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금성교회는 제주도 최초의 자생교회로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에 파송 받기 전에 서울과 평양에서 유학하던 조봉호 선생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내려와 동네 사람들과 함께 회집예배를 드린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들어가도 되나 조심스러웠지만 설마 내쫓기라도 하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안쪽으로 향했다. 내부는 일반적인 교회와 딱히 다를 것이 없어 보였으나 전기자동차 충전기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이 교회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전기자동차 충전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서는 전기자동차가 꽤나 많이 보급됐나보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인터넷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스탬프를 찍는 통이 보였다. 원래 스탬프를 찍는 책자가 따로 있는지 확인해보지를 않아 준비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가방 안에 기자수첩이 있어 꿩 대신 닭으로 여백 위에 도장을 박았다. “순종의 길”이라는 문장과 함께 교회 건물이 그려져 있는 스탬프였다. 그림은 아마도 금성교회를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스탬프를 찾아다니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순종의 길 마지막 코스인 협재교회에 도착하기까지 새로운 스탬프는 없어 조금 아쉬웠다.
여기가 어디죠?
금성교회 이후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하나 조바심이 났다. 블로그를 보니 ‘남당물’이란 곳이 다음 행선지인데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봐도 도통 나오지 않아 일단 물이라니까 바닷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막다른 골목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마침 길고양이가 눈에 띄어 고양이에게 “어디로 가야하냐”며 하소연을 늘어놨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창피함 따위는 없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니 보라색 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블로그에서 봤던 기억이 나 스마트폰으로 확인해보니 이 리본을 따라가면 다음 행선지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다시금 길을 나서 5~7분 정도를 걸으니 바다가 보이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리본이 보이지 않아 또 한참을 헤매다가 남당암수라는 곳을 발견했다. 남당물과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곳인 것 같은데 관련 안내문이 없어 긴가민가했다. 남당암수는 남탕과 여탕이라는 표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주민들의 목욕탕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인 듯하다.
다시 길을 되돌아보니 그토록 찾기 힘들었던 길안내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굉장히 눈이 좋은 사람인 듯하다. 왜 이렇게 안내판을 조그마하게 만들었는지 정말 찾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길을 제대로 찾았는지 중간중간 보라색 리본이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어 쉽게 다음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 장소는 옛날 금성교회 예배당이다. 도착해보니 건물은 있었지만 관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폐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깨진 창문 안을 바라다보니 뭔가 공사를 한 것인지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원형을 보존하면서 사람들이 안에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계속 보라색 리본을 따라 길을 나아가니 차도가 나타났다. 이때부터 다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리본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 노인회관을 지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속 들어가는데 역시나 길을 잃고 말았다. 정말 초행길에 가이드 없이 길을 나서니 어려움이 컸다. 겨우 보라색 리본을 찾았다 싶어 따라가다보면 방금 왔던 길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사나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길을 묻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을 주민에게 길을 물었다.
“혹시 이도종 목사 생가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거기 주소가 어디인데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블로그에는 주소는 적혀져 있지 않았기에 뭐라 답을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께서 무어라 길을 알려주시긴 했는데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어 일단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도종 목사 생가터는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했다. 참고로 이도종 목사는 제주출신 첫 목사로 제주 4‧3사건 직후 삼엄한 상황에서 1948년 6월 교인 심방을 위해 대정교회를 향해 가다가 무릉2리 인향동 인근에서 무장대에 붙잡혀 솔밭 구덩이에 생매장을 당했다. 이 목사는 죽음의 순간에도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 목사의 시신은 1년이 넘게 발견되지 않았다가 한 무장대의 증언으로 찾을 수 있게 됐다. 이도종 목사는 이 죽음으로 제주도 목회자 첫 순교자로 기록됐다.
다음은 귀덕리로 접어들었다. 계속해서 시골길만 나와서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무슨 절 같은 곳을 지나니 조봉호 선생 생가 터에 도착했다. 조봉호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1904년 부친이 사망한 이후 귀도해 1908년 제주도 금성교회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3‧1 운동 이후 조봉호 선생은 독립금 자금을 모금한다. 그는 제주도 일대에서 1만원 가량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을 했다. 그러나 1919년 7월 일제 경찰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발각 돼 관련자 60여명과 함께 체포됐다. 조봉호 선생은 동지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스스로 제주도 내 자금 모금 총 책임자라고 자처했다. 그렇게 1919년 11월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으로 1920년 4월 28일, 3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조봉호 선생의 생가터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기는 했지만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어 두 집 중 어느 쪽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누군가 사는 듯해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다음으로 이동했다.
다음 행선지는 한림교회. 이 교회도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조봉호 선생 생가터를 지나 밭이 한없이 펼쳐진 시골길을 지나다보니 멀리서 차도가 보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한림교회에 도착하는지 네이버 지도를 펼쳐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략 1시간 30분은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모양이다. 최종 목적지인 협재교회는 한림교회에서 30분 거리, 즉 앞으로 2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다. 오후에 제주도에서 목회를 하는 침례교 목사님과의 인터뷰가 잡혀있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쩔수 없이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타야 할 버스는 202번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이 저 멀리서 다가왔다. 한 20분은 기다려야 올 줄 알았던 202번이 신호에 걸려 저만치에 정차하고 있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순례여행도 중간중간 버스를 타기도 한다고 하니 주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하고 냉큼 버스에 올랐다. 한림교회를 들리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무리라는 생각에 바로 협재교회로 가기로 했다.
협재교회에 도착하니 이제 다 끝났다는 마음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역시나 소심한 마음에 교회 안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예배당 입구에 마련된 스탬프를 찍으며 순례길 일정을 마무리했다.
제주=범영수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