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단은 결코 작은 교단이 아니다. 성경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뛰어나다. 뿌리도 깊다. 게다가 이 땅에 오롯이 하나로 우뚝 서 있다.
따라서 하나가 둘로 갈라져 어느 쪽이 진짜냐, 누가 장자교단이냐는 식의 싸움이 우리 교단에는 없다. 한국 개신교단 가운데 우리와 같은 교단이 없다. 침례교인으로서 당당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물론, 선배 목사님들의 지혜와 각별한 헌신과 협동의 정신이 맺은 결실이다.
그러나 역할 혹은 기여라는 측면에서는 ‘너무 부족하다’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침례교회의 역사적 뿌리와 정체성에서 그러하다. 고유하면서도 정통적인 역사,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완숙한 정치체제를 갖췄다고 평가될 수 있는 교파/교단은 극히 적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이 셋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와 부흥운동이라는 특기할만한 역사를 갖추고 있지만 웨슬리는 충분히 정립된 조직신학을 남기지 않았다. 반면에, 침례교회는 확고한 성경적 신학과 교회론 위에서 출발했다. 교회와 신학의 그 역사성과 정밀성을 피로써 입증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장로교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장로교인들의 자랑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내의 모든 장로교단과 장로교인들을 다 합쳐도 미국 남침례교단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지 교세의 크기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을 미국답게 만들고 움직이는, 혹은 주도하는 ‘정신’은 침례교에서 나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것이 비록 정치적 욕망이나 당리당략에 의해 채색되고 변질되는 면이 많더라도 그 밑바탕에는 분명코 ‘침례교적 회중주의’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아직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정체성을 상실하면 존립근거를 상실한다
그런데 우리 교단의 목사들이나 교인들 가운데는 종종 ‘침례교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 큰 착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 침례교인들은 어떤 것이든 자기 소견대로 선택해도 되는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넘어가면 안 되는 경계선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정체성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을 선명하게 한다는 것은 곧 성경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이다. 정체성이 붕괴될 때 성경을 벗어나기 십상이며,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정체성의 훼손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훼손이 엄중할수록 그에 뒤따르는 대가도 엄중해진다. 교단이 정체성을 잃으면 결국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 소멸의 길을 가는 것인데, 그 방법과 시한은 어떤 식으로 정체성을 잃느냐에 달라질 뿐이다.
우리 교단이 매우 취약한 두 번째 지점은 ‘이단’ 문제에서다. 이단(사이비)문제는 단순히 ‘교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단(사이비)는 일종의 기생충이다. 기생충은 반드시 ‘숙주’가 있고 번식하기 위한 환경이 있는 법이다. 이단(사이비)라는 기생충은 정통교회의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교인들’을 포섭하고 변질시킨다. 기회가 좋으면 ‘교회’를 장악한다. 교회를 장악하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자금’과 ‘시간’과 ‘전략’만 어느 정도 갖추면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목사’다.
이단 교리에 잘 훈련된 ‘인물’을 마치 정통파 신앙을 정말 잘 배운 헌신자로 각색하고, 정통파 신학을 잘 배운 사람으로 ‘신분세탁’을 해 유력한 교회에서 훌륭하게 사역한 ‘차세대’ 젊은 지도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주도면밀한 공작을 통해 유력한 교회를, 나아가서는 교단을 장악할 수 있다.
정반대로 이단으로 낙인찍힌 교회가 그 이단 ‘교단’에서 이탈한 것처럼 위장해 정통파 교단, 지방회 등에 들어와 정통교단 소속이라는 방패를 갖추고는 은밀하게 이단교회들과 소통하는 방식도 있다. 이렇게 해서 교단과 교인들 그리고 한국사회를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병들게 만든다. 이런 이단들은 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기생충에 관대하면 건강을 잃는다
현재 우리 교단은 이 두 가지 방식 모두에서 상당히 취약하다. 타 교단에서는 우리 교단을 향해 ‘지나치게 이단에 취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기도 하고, ‘원래 이단도 괜찮다는 입장인가?’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이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단친화적’(heresy-friendly) 방향성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고개를 꺄우뚱하기도 한다. 불과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단문제에 크게 취약해졌다. 이것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구조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신학교 교과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이단에 대한 엄밀한 대응은 ‘신학’에 대한 추상적이며 이상적인 관념에서 나오지 않는다. 해롭지 않은 ‘다름’ 혹은 ‘차이’와 해로운 ‘틀림’을 날카롭게 분별하고 ‘공공선’을 위해 단호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지금까지 신학대학에서는 특수침례교회의 ‘칼빈주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알미니우스 신학’이 뭔지 제대로 아는 이도 없다. 편협하게 어느 하나만을 강조해서 가르치지 말라는 ‘주장’ 속에 어느 것도 모르는, 즉 아무것도 모르는 무책임한 무지를 숨겼다. 날카로운 신학적 지성으로, 학생들의 무지를 깨뜨리고 지성을 갈고 닦아 ‘신학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사명을 간과했다. 이런 식이라면 졸업장 장사를 하면서 이단의 신분세탁을 용이하게 해주는 바보짓을 하게 될 여지가 더욱 커진다.
둘째, 교단총회의 이단대응 시스템에도 문제가 크다. 이단대응에 교단차원에서 엄밀하고 효과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이단 대응에 매우 피동적이며 소극적인 구조를 취해 한 세대가 흐른 결과, 이단에 대해 무지하기까지 해졌다. 이단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타교단총회에서 출간한 자료를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단(사이비)에 대한 무지가 만연해 목사들도 헷갈리고 교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시스템이 건강해야 모두 건강해진다
우리 교단에도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있기는 하지만 총회임원회가 결의해 위임한 ‘이단문제’를 다루도록 총회규약으로 정해져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총회임원회가 결정해 ‘지시’한 그대로 업무를 처리해 ‘총회임원회’와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정기총회’에 보고할 뿐이다. 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선제적으로, 예방적 차원에서 ‘미리’ 연구검토하고, 필요하다면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과 교회들에게 알려주고 교육하는 등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단 문제는 대단히 영민한 연구와 상당히 축적시킨 능력과 숙달된 기량을 오랫동안 갖춰야 비로소 제대로 된 전문가가 나온다.
타교단 이단대책위원회는 총회임원회 뿐만 아니라 어떤 개인 신자가 요청해도 즉각적으로 자료를 입수해 연구하고 문제가 있으면 본격적으로 대응하고 처결한다. 수시로 위험인자들을 적발하고 분석하고 보고서를 총회 홈페이지와 언론매체등을 통해 공시한다. 게다가 그 위원회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위원을 선임한다. 연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유능한 전문가를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배워야 한다. 더 늦지 않도록 조속히 시스템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단을 허술하게 대응하거나 방임하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단호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