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신약성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회 윤리와 종교관을 어떻게 직시하고 복음으로 해석하며 대응했을까? 신약성경은 헬라-로마의 문화적인 배경을 어떻게 도구로 활용하며 복음을 전했을까?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대는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가 폭넓게 퍼져있던 종교다원주의 상황이었다. 신약시대의 분위기에서 단 한 분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무신론을 의미할 정도로 다신교가 성행했다. 그리스도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유일신관이 오히려 충격적인 사상이었다.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은 당시의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지성이었다. 여러 신을 섬기던 신전인 로마의 판데온(Pantheon, 만신전)이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가 만연했던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인들에게 생활이고 문화였다.
초대교회는 복음전파 과정에서 다신교나 종교혼합주의 영향을 치열하게 극복해 나갔다. 당시의 사회에서 유행하던 풍조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은 투쟁을 수반한다. 복음은 이러한 문화 투쟁을 하며 사상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었다. 로마 황제 숭배의 현상과 그리스도인의 대응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분위기는 로마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허용됐다. 로마에 대한 충성의 표시인 로마 황제 숭배는 로마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정치 행위였다. 비록 정치 행위가 제의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종교적으로 여러 신을 섬기는 사회에서 로마 황제를 추가해 숭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앙인들에게 로마 황제 숭배가 정치 행위인지 아니면 종교 행위인지는 당시의 세계에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후일에 명확하게 보이는 일도 당시의 시점에는 구분하기 어려운 예도 있고,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풍토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끊임없는 저항과 정화를 실천해야 했다. 비록 로마 황제 숭배가 하나의 정치 행위일지라도, 또 로마 황제가 여러 신 가운데 하나의 신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다신교 문화와 싸워야 했다.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와 같은 당시 세계의 보편적인 상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이러한 극복의 환경은 구약성경에도 제시된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다신교와의 싸움이 창세기 1장 1절에 반영되어 있다. 이 구절은 유일한 하나님을 선포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세밀한 과정을 설명하려는 목적보다는 누가 천지를 창조했는지를 선포하는 내용이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 표현이 창세기의 창조 기사이다. 많은 신을 숭배하던 고대 세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며 최고의 신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창조 기사이다.
예수님이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주장을 펴는 신약성경의 골로새서도 이처럼 당시 세계의 사상적인 분위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창조와 연결해 설명한다(골 1:16; 참조, 요 1:1~3).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유일한 구원의 복음 선포는 당시 세계의 다신교 및 종교혼합주의와 충돌했다. 여러 신 가운데 또 다른 신을 추가해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을 배제하며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배타적인 복음 선포는 당시의 세계에서 혁명적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포는 단지 종교성을 넘어서는 문화투쟁이기도 했다. 다양성 존중이란 명목의 다신교 문화나 근원적인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영적 투쟁인 것이다. 결국, 복음 선포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여러 구원의 길과의 충돌이며, 종교다원주의 문화와의 충돌이다. 복음은 이 충돌을 뚫고 진군하며 유일한 구원의 통로를 전파했으며, 이 진군은 지금도 계속된다.
동성애의 뿌리인 종교다원주의
어떤 이유로 동성애의 뿌리가 종교다원주의인가? 종교다원주의의 원형은 무엇인가? 종교다원주의는 이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사상이다. 바울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분류하는 우상숭배는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창세기에 반영되어 있고, 신약시대에도 유행했던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를 우리 시대에는 ‘종교다원주의’라고 부른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 존중하자는 행위를 종교에 대입한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어떤 면에서 자유로운 사회에서 서로 간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권이며, 사랑의 실천이며, 평화와 공존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식당에서 한 끼 식사하면서 짜장면과 짬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기호의 차이가 아니다. 생명의 문제이다. 종교다원주의자는 인권, 대화, 평등, 평화, 사랑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주장을 편다. 달리 말하면, 각 종교는 각각 나름대로 구원의 통로가 있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들(gods)이 구원의 길을 다르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여러 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지점을 지향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비유가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가 여러 개 있듯이 구원의 길도 그렇다는 것이다. 각각의 등산로를 통해서 정상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과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목적지는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를 통해서, 불교에서는 오직 부처를 통해서, 이슬람에서는 오직 알라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즉, 종교다원주의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확대하면 이단들의 교주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배제하고 종교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크게는 종교통합이나 통일을 이루자는 사상이다. 복음 전파의 금지나 전도의 무용성이 나오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