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2

  • 등록 2025.03.11 17: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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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28
(창세기 9장 18절~11장 9절)

함이 아버지의 민망한 모습을 본 후 장막을 나가 셈과 야벳에게 알리자 두 사람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로 장막에 들어가 아버지 몸을 가렸죠. 그런데 함은 왜 처음 발견했을 때 아버지 몸을 가려 드리지 않았을까요? 경솔했다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함이 일부러 아버지 수치를 드러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함과 노아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어느 정도 설명됩니다. 서로를 향한 나쁜 감정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상처를 주고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알게 된 후 노아가 보인 행동도 지나쳤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지목해 그가 ‘형제의 종들의 종’, 그러니까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방주라는 기막힌 구원을 직접 경험한 이 가족의 인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구절입니다. 이 정도면 꽤나 막장이거든요. 노아가 하는 일을 보면 자기 행동에 대한 반성이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무지막지한 저주를 내렸죠. 함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 노아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자녀는 부모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함은 노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홍수 심판을 겪은 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생각하면 노아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어려웠겠다는 마음도 듭니다. 예고된 심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의 손가락질, 완고한 가족을 설득해야만 했던 시간, 실제로 마주한 심판의 두려움, 방주에서 나온 이후 느낀 막막함, 모든 문제를 손수 해결해야 하는 고독함 등이 수년간 그의 마음을 뒤덮었을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간절히 하나님 은혜를 원하지만 설령 은혜가 임해도 인생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죠. 가인의 문 앞에 죄가 엎드러져 있듯이 노아 손에 쥐어진 포도주병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어리석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 삶도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구하되,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들여 쌓은 탑이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10장은 노아 후손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지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들을 보면 야벳 후손은 주로 북쪽, 셈 후손은 동쪽, 함 후손은 서쪽에 많이 살았던 모양인데, 여기에서 함의 아들이자 노아가 내린 저주의 주인공 가나안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 후손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부족과 민족을 이루어 살았고 11장에 이르러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되죠. 하늘 높이 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 겁니다.


무엇 때문에 탑을 쌓았을까요? 홍수 심판이 가장 큰 동기가 되었을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 잘 살지만, 별안간 심판이 내리면 언제 세상이 끝장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죠.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셨어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약속에 대한 기억은 흐려지고 심판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만 남았을 겁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이 취한 행동은 우선 흩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온 인류가 단합해 다가올 심판을 대비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한곳에 모이고 나니 자연스럽게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과거에는 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는데 이제는 벽돌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돌과 돌 사이에 발랐던 진흙은 역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크고 견고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큰 성읍과 바벨탑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면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했는데도 인간은 오히려 힘을 키워 심판을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오랫동안 보여 준 심성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이나 예물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고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도 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죄로 뒤덮은 사람들이 홍수 심판을 받았는데도 조금도 반성하지 못한 인류는 바벨탑을 쌓아 올려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오르려 했습니다. 이런 세태를 하나님이 용납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두 한 부족이면서 같은 언어를 쓰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같은 이상 바벨탑을 무너뜨린다 해도 언젠가 또다시 시도하리라는 말씀이죠.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은 인간이 결국 하나님을 이기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앞으로도 이런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죠.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해법은 언어를 여러 개로 갈라놓는 것이었습니다. 언어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고 입장도 변합니다. 같은 일을 할 수는 있어도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다 보면 결국에는 갈가리 나뉘게 되고 말죠. 모든 인간이 한마음이었을 때는 하나님과 경쟁하려고 할 수 있지만, 여러 마음으로 갈라지고 나면 인간끼리 경쟁하고 싸우다가 무너지고 맙니다. 공든 탑도 언젠가는 무너져 내리는 법이니까요.


한 언어를 사용했던 인간 무리가 다른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으로 분화된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 섭리에 부합하기도 합니다. 창조는 처음부터 다양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들어진 세상에 생명이 등장할 때로 돌아가 보면 사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땅에 사는 짐승 한두 가지, 하늘을 나는 날짐승 몇 종류만 있어도 충분하고 동물 종류가 적으면 나무와 풀도 다양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각기 그 종류대로, 그것도 너무나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양한 존재가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이 창조의 기본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회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성장 과정을 일부러 막고 사람을 한곳에 모아 하나님과 맞서려 했습니다. 엄격한 규율, 수직적인 조직 문화, 개인 욕망을 제한해 공동체만 이롭게 하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을 테고, 어느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세계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부터 흩어놓으셔야 했죠.


오늘날 교회가 겪는 문제도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분열을 막아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규칙을 만들고, 권위를 세우고, 질서를 세우려 하지만 바벨탑을 쌓는 일처럼 헛된 시도인지도 모릅니다. 강요된 결속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소통을 통해 연합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교회와 교회, 교회와 성도, 나아가 교회와 세상이 서로를 최대한 이해하고 존중해야 진정한 연합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여기에 성령님 은혜가 임한다면 교회는 물론 사회 전체가 진심으로 연합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늘 높이 쌓아 올린 뾰족한 탑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마음이 하나로 모인 넓은 바다가 돼야 합니다.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

관리자 기자 bpress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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