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야로 들어가다

  • 등록 2013.11.26 15: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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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달 동안 있을 예정으로 아내와 같이 제주도에 와 오늘로 열나흘 째가 된다. 사오 년 전에 왔을 때 이곳의 풍광에 끌려 언젠가 다시 와서 한 일 개월 정도 있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바람이 실현된 것이다.

 

올 때의 계획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진을 찍고 흐린 날이면 글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일을 할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기회가 다시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푹 쉬며 좋아하는 사진이나 실컷 찍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오고 나서 사나흘 쯤 되던 날 좀 멀리 나가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장기간 있을 예정이다 보니 차를 가지고 왔는데, 운전을 하며 아내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농담처럼 이번 기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휴가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한 것이었는데도 하고 나니 정말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주신 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마음이 그렇게 한가롭고 편할 수가 없다. 마치 군 생활에서 얻은 휴가처럼 달콤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정년퇴임을 하고 6년째가 되는데, 그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 왔다. 시답지 않은 것들이지만 신이 나서 즐겁게 썼다. 그러는 가운데 마냥 행복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라 했는데, 필자로서는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출산의 고통을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자로서 누리는 최대의 은총이요 행복이 출산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창작의 고통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다. 고통이지만 새까만 절망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희망의 과정이다.

 

흔히들 창작을 뼈를 깎는 고통의 과정이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뼈를 깎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연단시키는 과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글을 쓴다곤 하지만 창작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인물을 사실에 따라 쓰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글을 즐기며 쓴다. 물론 골몰하다 보니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고통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스포츠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다 보면 숨이 차도록 힘이 들지만 즐겁다.

 

필자는 이 같은 마음으로 글을 써 왔다. 그런데 이곳에 와 하나님께서 주신 휴가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행복하게 써 왔던 글도 마음에 부담이 되었던 게 아니었든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에 대한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보니 정말이지 마음이 새의 깃털처럼 가볍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부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정년퇴임을 한 동료 교수들 중에는 오피스텔을 마련하여 집필실로 쓰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한 친구 교수는 그러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집이 일을 하기에 가장 편하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 머리가 무거워지면 거실로 나온단다. 그러면 마치 외출이라도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된단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공간이지만 환경이 달라지니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필자도 그 친구와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은 여행을 통해 좀 더 큰 외출을 하여 좀 더 큰, 아니 아주 큰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제 카메라가 고장 났다. 정말이지 난감했다. 구경을 하러 제주에 온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으러 온 것인데,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물어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고칠 수 있을지는 시간을 들여 살펴봐야 하니 두고 가랬다. 하는 수없이 되도록 빨리 부탁한다며 맡겨 두고 나왔다.

 

만약 고칠 수 없다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새로 살 수도 없고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나님께서 주신 휴가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하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는 이때 한 가지 깨들은 것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휴식이란 하늘나라에서밖에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 어느 때를 가리지 않고 연단을 위한 시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필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만약 고칠 수 없다면 큰맘 먹고 새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 여덟 시쯤 고치게 되니 찾아가라는 전화가 왔다. ‘할렐루야!’ 이럴 때 할렐루야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 고장나기전보다 더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이튿날인 어제는 성읍 민속마을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고장이 나기 전보다 카메라의 작동이 더 잘 되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고장 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고친 뒤에 찍어 보니 확실히 달랐다. 고장 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가 제주도로 출발하기 전에 가장 크게 바랐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여 돌아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바라던 대로 된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면 안 될 일이다.

 

반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다면 반길 일이 아니겠는가. 속이 좁다 보니 필자는 마음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라 것이 기도의 주가 됐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생활이 단조로워져 그런지 모르지만 넉넉하기까지는 아닐지라도 그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이다.

 

북적대는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본래대로 될 것 같아 걱정이지만, 그래도 그러지 않으려 기도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현재를 감사하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려 하고 있다.

 

문학에서는 여행을 비현실이라고도 하는데 사실이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고 우리는 현실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고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생각으로 방종하기 쉽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어디로도 탈출할 수가 없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눈이 지켜보고 계신다. 바다 속으로 숨어들어도 거기에 계셔 보고 계신다.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부담스럽고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분 시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끌어 주시는 은혜를 부른다. 그분의 눈은 피하려 하면 무섭지만, 자진하여 그 시야로 들어가면 은혜의 빛이 나를 비춘다.

 

이곳에 와서 한 이틀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 나가 사진을 찍었더니 얼굴이 몰라보게 탔다.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말도 있는지라 가을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 게으름을 피운 게 탈이었다.

 

그럼에도 다음날 역시 썬크림을 바를 생각은 일지 않았다. 까짓것 타려면 타 보라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내는 바르라 했지만 기왕 탔으니 탈 바에야 더 타 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열흘이상을 햇볕에 그대로 노출하다 보니 타도 너무 타 버렸다. 검둥이도 그런 검둥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바르기 시작한다는 것도 우습고 하여 돌아가는 날까지 이대로 버텨 볼 생각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아내는 지금이라도 바르라고 하지만, 겨울을 보내다 보면 다시 본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며 고개를 젓고 있는 필자이다. 그렇지만 조금일지라도 넉넉해진 마음만은 본래대로 되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곳에 와서 아직 계획한 기간의 절반도 안 되었는데 얼굴이 이 모양이니 돌아갈 때쯤의 상태는 상상도 잘 안 된다. 햇살에 노출되어 사진을 찍는 한 얼굴은 계속 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가만 놔 둔 상태로는 넉넉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광과 여유로운 환경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도와 노력이 없는 한 어렵다. 얼굴은 햇살에 노출되는 것으로 까매지지만 마음은 애써 하나님의 시야로 들어가지 않으면 넉넉해지지도 부드럽고 따스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분의 시야만큼 은혜로운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임 종 석 목사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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