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인(6)

  • 등록 2025.06.04 14: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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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16

5. 노재천 목사(盧載天, 1884-1964)

 

노재천은 1884년 1월 21일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에서 한학자 노성우의 둘째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이 마을의 훈장이었기에 그 밑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07년 김용산과 결혼했고, 이듬해인 1908년 10월 20일 충청북도 구룡촌 교회에서 개최된 당회(지방회)에서 예천구역 전도인 박영호의 권유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는데(이때 장전욱, 김재덕도 함께 개종), 이날에 장남 한성(아들 노윤백 전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손자 노은석 전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을 득남하여 큰 경사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장진규 총찰과 장기덕 반장이 담당하던 훤평교회(현 용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 6월 충청북도 옥동의 구룡촌 교회에서 개최된 펜윅의 사경회와 당회 직후 신명균 목사에게 침례를 받고 예비 전도가 되어 그해 8월 경상북도 영양지역에 전도사역자로 파송 받음으로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1913년 3월 노재천은 장기덕 총장과 함께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도로 파송되어 호별 방문 전도를 했는데, 집안은 부인에게 맡기고 ‘불고가사’와 ‘불고처자’의 신앙으로 오직 전도에만 열중했다. 전도자로서 그의 생활비(노비)는 매월 10원이었는데, 그중 5원은 현금으로, 나머지는 5원 분량의 성경과 전도 책자를 원산총부로부터 받았다. 이때 교단 형편도 어려워 정규적으로 생활비가 송금되지 않아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고, 마침 총부로부터 전보가 와서 뜯어보면 마태복음 6장 8절이 말씀이 노비를 대신했다. 다시 좋은 소식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전보를 받아보면 “하나님께서 약백(욥)을 믿으시니 마귀에게 허락하심 그와 같이 공뇌모험”이라는 내용만 적혀있었다. 몇 달째 생활비가 오지 않아 방세 6원이 밀리고 주인집에서 보리쌀을 겨우 빌려 견디며 단념하고 있을 때 다시 전보가 와서 “60원과 함께 10원은 노재천에게 주어 충청남도 예산의 총찰로 보내고 10원은 이종배에게 주어 황해도 평산 지방의 총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충당하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노재천이 예산 지방에서 총찰로 사역할 때 보령 지방에서 왕신을 섬기던 김중천 일가가 주님을 영접하도록 개종시킴으로 그곳의 전도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5년 경상북도 포항의 조사리에서 제10차 대화회(총회)가 열렸을 때, 노재천 전도는 교사(전도사)로 임명받아 경상남도 진주구역과 포항구역에 파송되어 사역했다. 1917년 간도의 종성동에서 개최된 제12차 대화회(총회)에서 노재천 교사는 전치규, 한봉관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중국의 임강현과 집안현 지역을 담당했다.

 

노재천 목사가 자신의 임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회고담이 전한다. 고향을 떠나 원산총부를 거쳐 영흥을 지나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행할 때 성탄절이 지난 엄동설한(嚴冬雪寒)이었다. 매서운 혹한 때문에 귀와 입은 수건으로 싸매고 발은 감발로 감았으며 등에는 바구니를 짊어진 모양이 마치 에스키모를 방불케 했다. 이것은 동절기에 북방 전도여행길에 오르던 사역자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황초령 30리 길을 넘어 한반도 제일의 고산지인 장진에 이르자 백설은 천지를 뒤덮고 빙판은 여행자의 간담을 녹였으며 11일 동안 걸어 중강진에 이르렀다. 얼굴은 얼어서 부었고, 눈에 반사된 햇살에 타서 검게 되어 본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임강현 대목송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들의 뜨거운 환대와 사랑으로 모든 고초가 일시에 눈처럼 녹았다. 집회를 마치면 교인들이 음식을 대접했는데, 한겨울에 냉면과 냉김치국 그리고 냉수만 마시게 되어 배탈과 소화불량으로 1개월간 고생했고, 나중에는 시력까지 상실할 뻔했다. 임지인 중국의 통화현과 집안현으로 가야 했기에 다시 길을 떠나 눈 많은 험로로 향하는데, 중국어를 몰라 길을 묻지 못하고 엄동설한에 길을 잃고 정신없이 헤매다가 마침 집안현 약모초안으로 가는 두 전도인을 만나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부터 400여 리의 길을 앞에서는 이종근 목사가 길을 헤쳐나가고 뒤에서는 한 사람이 따르면서 며칠을 걸어 삼도구에 당도했다. 도중에 노일령을 넘어야 하는데 그 산에 홍의적 소굴이 있어 이를 피해 멀리 흘루망자라는 곳을 향해 가다가 해는 지고 하룻밤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하여 헤매다가 산중에서 한 집을 만나 일박을 청하고 옥수수 죽을 대접받았다.

 

새벽에 다시 출발하여 흘루항자로 향하는데 때는 음력 2월이라 눈이 천지를 뒤덮고 있어 태산준령을 3개나 넘자니 힘은 다하고 허기져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게 됐다. 해는 서산에 지고 천지를 뒤덮은 눈 위에서 최후의 순간을 느낀 세 사람은 마지막 제단을 쌓았다. “구주님께서 찬송하옴 절 붓드신 고으신 신랑 보혈 아래 유사올 때, 저는 넉넉 평안하올 종, 상전님 상전님 매일 위로 합시오, 절 간정하심 또 순복케 하시옵소서”라고 ‘복음찬미’를 부르는데 너무나 허기져서 목 속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을 정도였다. 봇짐 속에 든 찬미 책과 성경을 찾는데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떡 한 조각이 나타났다. 아마도 한 달 전에 임강현에서 고향 사람 김주일을 만났을 때 떡 대접을 받고 그때 봇짐 속에 한 덩어리를 넣어 줬는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병이라는 떡인데, 딱딱하게 마른 떡 하나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들고 눈을 움켜서 마른 입을 축인 후 먹으니 눈뜨기가 한결 부드럽고 힘이 생겼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관리자 기자 bpress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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