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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재 경험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자녀의 감정에 상해를 입힌다. 자녀는 발달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현재로서 자유롭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감정이 오염됐다고 한다.

오염된 감정은 자신이 자신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 거짓자기를 생성하게 한다. 그 거짓자기는 형제들 사이에서 돌보는 자, 작은 부모, 또는 영웅 등으로 역할을 떠안게 한다. 요즘은 자녀를 한 명 정도 낳는 것을 고려하면 핵가족 안에서의 역할은 마스코트, 반항아, 또는 중재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가 참자기로서 스스로 느끼는 참된 감정이 숨고 오염된 감정이 만들어 내는 거짓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은 직면이다. 직면은 어린 시절의 감정을 재 경험 하는 것이다. 그 감정은 과거 상처 입은 사건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기에 과거 상처 입은 사건에 대한 직면을 할 때 그 사건과 연결 되어 있는 감정을 함께 직면하게 된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이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서 참자기가 숨어 버리면 동시에 참 감정도 숨어 버린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아버지가 늙고 자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됐지만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당시의 아버지를 만나는 작업이 직면이다.

 

그러므로 직면은 자연스럽게 그 당시의 감정과도 다시 만나는 작업이다. 한 가지 다른 것은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아버지이지만 재 경험을 통해 상처 입은 성인 아이가 아버지와의 맞장뜨기를 통해 그 당시 자신의 경계선을 지키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어린 시절 발달 단계에서 참 자기와 참 자신의 감정에 방어하는 에너지가 자신에게 있어야 했고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참 자기와 참 감정을 지키며 건강하게 성숙했어야 할 것들에 대하여 재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재 경험을 할 때에 부당한 아버지의 강압에 맞서 분노를 폭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부당함을 따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았던 것에 대한 억을함을 토해 낼 수도 있다. 이렇게 어린 시절 경험 했어야만 할 복잡한 감정을 경험할 때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이 억눌리며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던 오염된 감정을 치유하게 된다. 이 과정은 가해자였던 아버지와 피해자였던 자신과의 사이에서 상처 입은 성인 아이를 치유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참 자기로 살게 하는 토대를 만들어 준다.

 

그 다음 단계는 용서다. 자신의 참자기를 찾으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들은 자신의 치유경험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처럼 어린 시절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데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실제로 부자지간에 치유를 받으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자녀의 3세대 체계는 항상 동일하게 있으나 흐르는 물처럼 계속하여 대를 잇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3세대 체계가 지옥과도 같은 역기능체계가 아닌 사랑이 넘치는 순기능의 체계로 가는 것이 인생이 누려야 될 목표요, 행복의 정의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로서 표현되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는 관계가 사랑의 절대적인 관계가 된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자녀를 통하여 대를 잇고 있다. 그 자녀에게는 조상의 가족체계의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조상에 얽매여서 현재의 자신의 삶을 참자기로서 살지 못하는 것이 역기능이요, 수치심이다. 자녀였던 내가 자라 조상처럼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억압한다면 그 또한 역기능의 대물림이요, 이러한 대물림으로 어린 시절 피해자였던 내가 가해자인 아버지가 되어 자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상처 입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을 못주고 아들의 의무만을 강조하여 상처를 준다.

 

어느 가족은 먼저 치유 받은 건강한 자녀들이 상처 입은 부모를 잘 섬기는 경우도 있다. 가족 체계에 있어서 치유와 사랑의 공급정도가 현재의 상황에서 서로 다를 수 있기에 기계적인 순서나 잣대를 가지면 안 된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되, 아들의 자리에 있어야 되, 부모에게 순종해야 되라고 말하는 부모는 이미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 사랑을 받은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랑이 넘치는 부모들은 순종해야 되라는 말을 거의 안한다. 자녀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공급 할 뿐이다. 미성숙한 자녀들에게는 직접적으로 부모에 대한 순종을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어디가 아들의 자리인지도 가르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자녀들이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신의 경계를 아버지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랑이 없이 전하는 정확한 복음은 교리가 되고 율법이 된다.

 

박종화 목사 / 빛과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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