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골프 PGA 정회원, 2011·2012년 연속 대한민국 골프지도자 대상 수상, 24년간 SBS Golf, MBC Sports, JTBC Golf의 골프 해설과 프로그램 기획·제작, Teaching & Coaching 관련 방송 메인 MC, 900여 편의 방송 기획·제작 등 내 이름 앞에 붙은 화려한 경력이다. 이런 성장을 이루기까지 늘 나의 힘이 된 것은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었다. ‘엄마 사랑해’라는 말 한 번 못 한 11살 때,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없는 외로움과 가난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신문 배달을 했고, 방학에는 연탄공장에서 일을 했다. 힘들 때마다 ‘우리 욱휴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밤새워 공부해 중·고등학교 때는 장학금을 받으며 반장과 학생회장을 했고, 꿈꾸던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여러 장학금과 과외교사로 대학 시절에 대기업 임원 월급 2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그때 과외를 하던 제자와 사랑이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함께 유학을 가든지 헤어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지난 8월 7일, 여의도 총회빌딩 대예배실에서 드려진 침례교사회봉사단 설립 감사예배는 단순한 조직 출범을 넘어, 복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자리였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에 자원한 사람들”(롬 12:15)이란 설교 제목처럼, 침례교사회봉사단의 설립은 고통받는 이웃의 눈물에 교단이 공동체로 응답하겠다는 신앙의 선언이었다. 이날 예배에서는 총회 산하 사회봉사단이 정식 기관으로 발족했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침례교회가 단지 설교와 성례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을 섬기는 사역에도 한 축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특히 단장 한덕진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돼, 기아와 빈곤, 소외의 자리로 나아가겠다”고 선포했고, 이욥 총회장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교단이 공적으로 인정한 봉사단체가 하나의 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침례교회의 사회적 책임 의식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교단 산하 공식 기구로 ‘사회봉사단’을 설립한 것은 다른 교단에서도 흔치 않은 전례다. 가톨릭에는 교구 차원의 복지기관들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존재하지만, 개신교 안에서는 한교봉을 제외하면 대
오는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되찾은 지 80주년이 되는 광복절이다. 이 날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회복을 함께 기억하며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과 미래를 성찰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와 침례교회는 광복절을 맞아 시대적 사명을 되새기며 복음의 빛으로 사회를 섬겨야 할 책임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광복은 단지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의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생명과 자유, 정의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뜻한다. 침례교회는 ‘성경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 전통 위에 서 있다. 일제 강점기의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순수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신앙 공동체를 지켜온 신앙 선배들의 믿음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침례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시대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고, 교단의 주요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감내했다. 교단은 한때 폐쇄되고, 주요 재산이 몰수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시대가 어두울수록 교회는 더욱 빛이 돼야 한다”는 신념 아래,
백남조 목사는 평소 동료들로부터 “꼬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사람이요 진리에 관해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큼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공과 사가 분명했고,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불의와 타협한 적이 없었다. 본 교단의 교규집 제13조 벌칙 43조에 “교역자 및 교우 중 성경에 교유된 점에 배이된 중대실태 또는 위반행위가 있을 경우는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교훈과 같이 개인적으로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치 않을 경우는 2~3명 교우를 위원으로 하여 권고토록 하고 또 이에도 불순종할 경우에는 개교회에 있어서 공개 권고토록 하고 그 때도 개선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 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44조에 벌칙의 종류는 출교, 정권, 권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교단의 교칙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규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 교회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고려하지 않고 단호히 시행했다. 이와 같이 올바른 법집행을 통해 교단 행정이 바로 서고 질서가 올바로 잡히는데 크
1955년 8월 20일,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출범한 ‘침례회보’는 오늘의 ‘침례신문’으로 이어지며 정확히 70년의 세월을 걸어왔다. 단순히 하나의 언론이 70년간 존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중하지만, 침례신문은 그 이상으로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앙과 정체성, 복음적 사명을 함께 짊어지며 호흡해 온 교단 언론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교단의 공식 기관지로서 침례신문은 창간 이래 지금까지,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침례교회의 복음적 가치와 정체성을 지켜왔다.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선교 중심’이라는 신학적 좌표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그 방향을 바로잡아온 언론이었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교단과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진리의 나침반으로 사명을 감당해온 지난 시간은 단순한 연대기 이상의 ‘믿음의 유산’이 됐다. 침례신문은 70년 동안 수많은 기자들과 제작진의 헌신을 통해, 교단과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해왔다. 수많은 기사들은 단지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때론 기쁨을 나누고, 때론 고통을 위로하며, 공동체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담아냈다. 이러한 축적된 기록들은 단지 과거의 아카이브가 아닌, 한국 침례교회의 정체성과
백남조 목사(1875-1950) 백남조는 1875년 6월 9일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광천리에서 백운락의 4남 1년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비요 한학자였던 그는 일찍이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으나 반일사상가라는 명분으로 축출당해 귀국했다. 고향에서 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던 중에 지역 사회의 인정을 받아 영일 군청에서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35세 때(1910) 대한기독교회의 한 순회 전도인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주님을 영접한 이후 복음 전도에만 전념했다. 1912년 개최된 제7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 직분을 받아 강원도 울진, 울도(울릉도), 경상북도 예천, 포항지역에 전도사역을 했으며, 특히 허담이 울진구역 총찰로 임명되자 그가 맡고 있던 원우학교를 백남조 전도가 위임받아 관리했다. 순회 전도에 전념하던 그는 1919년 간도 종성동에서 개최된 제14차 대화회(총회)에서 김재형, 김영진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충청북도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파송을 받아 순회 사역을 했다. 1924년 강원도 울진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는 백남조 목사를 울진, 울도(울릉도), 포항지역으로 파송했고, 1925년 원산총
2025년도 무더운 여름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들의 여름 사역도 무더위를 잊을 만큼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다음세대들의 방학을 맞아 진행되는 여름 캠프와 선교 비전캠프, 그리고 총회가 주관하는 청소년 캠프와 어린이 캠프는 이미 대표적인 여름 사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교회 차원에서도 산간이나 바닷가에 위치한 수양관, 팬션, 리조트 등에서 부서별 또는 전교인이 함께하는 행사를 통해 교회 내 화합과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사역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교단을 대표하는 지구촌교회의 경우, 지역 복음화를 위해 전국 62개 교회를 대상으로 각 부서별 선교팀이 지역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펼치고 있다. 이는 침례교회 안에서 귀한 협력의 사례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처럼 바쁘고 풍성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교회들이 있는 반면, 그러한 사역조차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바로 미자립교회와 농어촌교회들이다. 이들 교회는 여름 사역을 전개할 수 있는 재정조차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목회자조차 생존의 문제에 내몰려 있는 현실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사람 구경조차 힘든 농어촌 지역의 교회들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국CCC가 주최한 여름수련회에 8000명가량이 모였던 적이 있다. 원래 1만 명은 거뜬히 모이는 여름수련회이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위기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2025년 침례교 청년선교캠프’가 ‘NEW Generation, NEW Challenge’란 주제로 7월 7~10일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단기념대강당에서 열렸다. 총회 청소년부와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세계선교훈련센터(WMTC) 등이 공동 주관한 행사였다. 준비된 무대를 보니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캠프 현장의 열기 역시 그 어떤 청년 집회 못지않았다.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시간, 찬양 가운데 터져 나온 눈물과 결단, 교회별 나눔 시간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은 분명 ‘다음세대의 희망’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감동 뒤에 남은 하나의 숫자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3500여 교회를 가진 교단에서 청년 400명만이 모였다는 사실은, 교단 전체 청년 인구를 고려할 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선교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숫자에 연연하지 마라. 그러나 숫자를 무시하지도 말라.” 400명은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모인 청년들이라
이른 장마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역대 가장 짧은 장마 기간이 지나가고 본격적인 폭염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다. 낮 기온이 평균 35도 이상으로 치솟으며 전국이 달아오르고 있고, 곳곳에서 폭염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냉방용품 사용이 늘어나면서 전기 화재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이 폭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걱정이다. 기후 위기는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사회적 문제로, 우리 모두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은 여전히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기후 위기에 둔감한 이유는 그것이 피부에 직접적인 손해로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 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제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점점 국토가 사라지고 있는 나라가 존재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산불이 발생하며, 우리나라 면적의 몇 배에 달하는 산림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 200년간 화석연료를 사용해온 결과, 지구의 대기 온도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어떤 지역에는 ‘물폭탄’이라 불릴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다른 지역은 상상할 수 없는 가뭄으로
“지금 저기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전도사가 바로 우리 교회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아직 결혼을 안하고 있어서 큰일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혹시 소개해줄 믿음 좋은 자매가 있으면 소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저 권사님이 바로 전도사의 어머니입니다.” 지난 6월 27~28일 충북 단양에서 열린 영적성장대회의 한 장면이다. 영성대회 설교를 맡은 목회자의 간절한 요청은 좌중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은 여기에서 소개된 전도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한 장로는 “우리 교회도 결혼 못한 형제 자매들이 있는데 50세가 다 되도록 결혼을 안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 또한 40~50대 싱글 교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만 30여 명, 집계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50여 명은 가뿐히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세대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한국교회 담론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리는 표현이 됐다. 그러나 그 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은 여전히 부족하다. 청소년과 청년 사역은 강조되지만, 정작 다음세대를 낳고 기를 결혼이라는 출발점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 앞에
7월이 되면 총회 주관으로, 그리고 개교회별로 다음세대 사역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교회와 교단의 미래가 바로 이들에게 달려 있는 만큼, 7월의 행사에는 많은 관심과 비중, 그리고 적잖은 재정이 투입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헌신, 열정이 과연 진정한 열매로 맺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이는 오늘의 교회가 여전히 다음세대를 향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음세대 사역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다. 교회 내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이탈이 가속화되면서, 교회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성경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교육의 강화, 다음세대를 위한 실질적인 커뮤니티 형성, 교회와 가정 간 협력적 관계 구축이 절실한 때다. 성경적이고 실용적인 말씀 교육의 강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이나 주일학교에서 성경 내용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깊이나 실용성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앙을 실제 삶에 적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이 부족하다. 젊은 세대는 이론에 머무는 신앙에는 흥미를
기후 위기는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장마를 통해 우리에게 가슴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극한 기후’라는 말을 남기며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재해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고지대로 혹은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하며 기후 위기의 고통 가운데 있다. 이처럼 창조 세계의 신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이는 외면하거나 방임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대처할 과제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지구를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급변하는 지구 생태계 위기는 비단 우리 시대, 우리 교회만의 도전과 관심사가 아니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도 파괴된 숲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초에 창설된 시토 수도회도 다른 영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삼림복구를 위해 나무 다시 심기 운동을 벌였고, 훼손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힘썼다. 우리 시대의 주 관심사인 생태운동(生態運動)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역사에서 진행되었던 일이다. 현재 인류의 주소는 423이라고 한다. 423은 무슨 숫자일까?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이다. 마리아와 요셉
박기양 목사(朴基陽, 1894-1979) 박기양은 1894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북동에서 박규석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5세 때(1899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해 4년간 수학했는데, 훈장이 가르침에 따라 잘 읽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배우면 두세 가지를 깨닫는 등 그의 자질이 뛰어나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서당을 수료할 즈음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어 1903년 9월 세상을 떠났고, 아내를 잃은 부친은 방황하다가 훌쩍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로 인해 박기양은 졸지에 부모를 잃게 됐고, 급기야 1년 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다른 동생들과 함께 외갓집에서 성장했고, 17세 때(1911년) 소산동에 살던 임학이의 장녀와 결혼했다. 1911년 4월 충청북도 영동에서 활동하던 박영호 전도인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고, 1915년 이종덕 감목(총회장)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10월 경상북도 포항 조사리에서 개최된 제10차 대화회(총회)에서 반장 직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16년 경상북도 문경의 신원(세원)에서 개최된 제11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인으로 임명받았다. 1917년 2월 4일 장남이 출생했으나
농촌교회가 점점 소멸되고 있다. 농촌 인구가 줄어들면서 마을 자체가 사라지고, 그 마을의 대표적 인프라라 할 수 있는 교회도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농촌교회에 부임한 한 목회자는 예배보다 고령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토로한다. 장례예배는 이제 농촌 목회자의 주요 사역 중 하나가 돼 버렸다. 농촌교회를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다양한 시도는, 그 생존이 곧 한국교회의 존속과 직결된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출발했다. 교계 연합기관을 중심으로 농촌교회와 지역 성도들이 생산한 특산물을 바자회나 장터 등을 통해 유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 농특산물의 품목도 다양하지 않아 소비자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한국교회 부흥의 절정은 1990년대였다.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의 흐름에 따라, 지방과 농촌의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도시교회로 옮겨 갔다. 물론 지방과 농촌에 남아 교회를 섬기며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이후, 한국교회는 정체기에 들어섰다. 대도시 중심의 사역, 지역 불균형, 저출산, 주 5일제 시행 등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양적 성장의 둔화를 겪기 시작했다. 한때 120
5. 노재천 목사(盧載天, 1884-1964) (2)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때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앞을 막고 있는 준령을 넘기 시작했다. 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므로 새로운 용기와 남은 힘을 다하여 준령을 넘어 약무초안교회에 찾아 들었다. 형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고 힘을 얻은 그들은 곧 사경회를 열어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노재천 목사는 간도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 강원도 행곡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에서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고, 이후 이곳에서 순회사역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1938년 웅기교회의 ‘달편지’ 발각사건이 발발했다.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는데, 이는 동아기독교 탄압의 빌미가 되어 노재천 목사를 포함해 김영관 감목(총회장)·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 등이 원산경찰서로 소환됐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답변으로 인해 일제는 가둔지 3개월 만에 이들을 검찰에 송치하여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했다. 이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