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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및 재혼 가정에 대한 목회자 인식의 전환 (26)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이 회복된다는 것은 교회가 성장위주의 개교회 주의로 나가는 것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지역사회를 향하여 성실한 자세로 ‘디아코니아’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개혁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3. 기독교가정의 미래와 윤리적 전망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부단히 개혁적인(이미 개혁이 된 교회가 아니라 지금 개혁하고 있는 교회의 사명)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의 외침은 바로 가족공동체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김병권은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제시한 가정준칙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논하면서 그 준칙을 통하여 그것이 어떻게 사회로 투영되어 나갔는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종들도 윤리적 권면을 받을 수 있는 인격적 주체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정준칙은 당대 사회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아내, 자녀, 종)에게 먼저 윤리적 권면을 한다. 당시 문화에서 어떤 법적, 도덕적 지위도 없던 자들에게 인격적 도덕적 책임감을 부여하고 그들을 도덕적 주체로 간주했다. 둘째, 가정준칙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엡 5:21절의 명령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당대 사회 풍토에서 보자면 근본적인 변혁성을 담고 있다.

 

아내나 남편, 자녀나 부모, 종이나 상전 모두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면 서로를 향한 그 명령들에 복종해야만 한다. 더구나 남편, 부모, 상전들에게 명령한 내용이 아내, 자녀, 종들에게 명령한 내용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변화’를 요청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정준칙에 담겨 있는 사회 변혁적 성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가정준칙이 제도의 교정보다는 실제적 관계의 교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가정준칙 안에 담겨 있는 변혁적 실천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 가정준칙에는 당대 사회의 가부장제도나 노예제도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없다. 그러나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인격적 주체로 다룰 뿐 아니라 상하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복종’의 의무를 명령한 것은 실제적인 삶의 혁명적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사회윤리를 향하여 열린 자세로 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여기서 에큐메니칼이냐 에반젤리칼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선명한 획을 그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두 가지의 입장을 함유하면서 교회의 갱신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공존하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성령으로 인도된 믿음의 공동체는 개인의 변화와 사회적인 변혁에 관한 동시적인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란’들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 속으로 들어가 모범을 보이면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측면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사회가 개혁되는 속도보다 구조악 때문에 사회가 악해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양면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곧 옳지 못한 사회구조 자체를 제거하면서 고쳐나가는 사회구원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 사회구원을 실행하는데 폭력과 공산주의 이론을 동원하는 것이 문제이지 건전한 의미에서의 사회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구원의 영성과 사회구원의 윤리성은 함께 손을 잡고 나가야 한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교회와 사회는 항상 개혁과 윤리적 과제 앞에 상관관계를 갖는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이혼 및 재혼가정들에 대한 목회적인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까? 동시에 목회 윤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저들을 케어할 수 있을까?


첫째, 목회의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탈피하고 교회 내에 존재하는 계급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교회의 갈등구조는 대개 목회자와 성도간의 대화부족, 일방적인 하향전달식의 체계로서 인격 대 인격의 깊이 있는 만남을 간과하기 쉽다.

 

성도들을 대할 때에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 식의 구별과 계급의식을 버려야 한다. 계급주의가 팽배한 공동체에서는 교회 내의 이혼자들, 재혼자들, 혹은 가정불화나 정서적 장애를 가진 자들을 변두리로 내모는 우(遇)를 범할 수 있다. 이로 보건대 목회자의 섬김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둘째, 상대방을 윤리적으로 예의 있게 대하는 기법을 훈련해야 한다. 흔히 교회 안에서 남의 비밀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자기주장이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상대방에게 섣부른 충고를 해주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한 얘기로 한국교회에서는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없고 교회에서 남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것이다. 그만큼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로써 상대방에게 어떤 역효과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배려가 없이 말하기만 좋아 하는 사람들이 생각 없는 말들을 내뱉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는 교회내의 인간관계의 갈등들과 비윤리적인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중심 위기상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를 만난 가정들을 치유하고 케어할 수 있으려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문제들을 올바로 분석하고 규명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매우 중요시하는 결과로 인간관계의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저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라는 등식을 추상적으로 제시할 뿐 구체적인 접근방법은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가급적 인간관계의 갈등은 정신건강 분야에서 잘 훈련된 교회사역자들이 신중하고 공정하게 해결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넷째, 교회는 이혼과 재혼을 경험하고 있는 가정들에게 지지집단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한 유사한 처지에 놓인 성도들 중에서 영적, 정서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그들을 이혼자의 멘토로서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의외의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미망인 자조(自助)그룹이라든지 재혼자 그룹, 그리고 편부모 슬하의 아동 돌보미 그룹 등을 통하여 하루빨리 정상적인 가족구조를 형성하도록 돕는다. 예를 들면 홀어머니와 사는 소년들에게 그들이 동일시 할 수 있는 남성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교회의 장로들이 그들을 데리고 정규적으로 일 년에 한 두 번 씩 캠핑을 가주거나 정례적인 미팅을 갖는 일 등이 그것이다.


한편 이혼 가정을 위한 교회적인 지원으로서 재혼중매 지원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재혼문제는 본인이 직접 나서기 어렵기 때문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양쪽의 가정을 잘 알고 있는 목회자가 나서서 연결시켜 줌으로써 연약한 가정을 건강한 가정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영적인 환경도 강화시켜 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재혼가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목회적인 지원은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다. 재혼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장점들을 상기시켜 주며, 감사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격려한다. 예를 들어 재혼으로 인하여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으며 무거운 짐도 나누어 짊어질 수 있게 되었고 재정적으로도 혼자 살 때 보다 조금이라도 여유로워 진 점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원론적인 방안이라고 할지 몰라도 목회자들이 기독교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에 모범을 보여 줄 때 이혼과 재혼가정이 교회공동체를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는 기독교 윤리강령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이혼으로 인한 가정해체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폭력을 휘두르며 배우자를 코너에 몰아붙이는 사람, 교회 직분자이면서 버젓이 외도를 즐기는 사람, 혼전 성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청년들이 아무래도 줄어들게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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