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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의 절규(絶叫)


얼마 전, 현직 조직폭력 단체에서 상당한 시간을 몸담았던 청년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 건장하고 우람한 체구에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눈빛은 무엇인가 애처롭고 슬픈 모습이 엿보였다. 그는 지금 조직폭력으로 유명한 단체에서 중간급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30대의 청년이었다.


그의 고민은 다른 것이 아니고 얼마 전에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부터 머리털을 민 삼손처럼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싸움도 할 수 없고 적을 향해 늘 일삼던 그런 욕도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폭으로서 점점 낙오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에게도 꾸지람을 받고, 후배들에게도 눈총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싸움으로 인해 몸에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상처를 다 치료한 후 무엇인가 이상 징후를 발견했는지 정밀 검사를 요구했다.


검진을 해보니 간암 2기 판정이 나왔다. 하긴 벌써부터 몸에는 해독되지 않음으로 생긴 이상이 있는 것을 알기는 했었다. 고민하는 가운데 아주 큰 결심을 했다. 그것은 이제 이 조직을 떠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있다가는 아주 초라하게 될 것이므로 이참에 떠나기로 했는데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손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청년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몸의 일부를 절단하던지 아니면 다른 조직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교도소에 가면 뒤를 봐주고 그때에 놓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러한 꿈을 꾸었을까? 그 이유가 있는데, 그가 7살 때 그의 부모는 선교사였다. 그래서 부모를 따라서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는 풍토병으로 어머니를 잃게 됐다. 어린 나이에 그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어린 나이에 가장 의지할 엄마를 잃었으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는가? 비록 아버지는 계시지만 사역으로 인해서 자녀만을 돌볼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미지의 나라에서 외톨이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 살았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했다. 그는 마음으로 다짐을 했다.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해야겠다.” 하며 중학생의 나이로 혼자 한국에 들어왔다. 시골에 조부가 살고 계셨는데 그를 돌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교회에 드릴 헌금을 훔쳐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방황하는 그를 조직의 대표가 데리고 가서 그와 함께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사회에 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끝이 있다. 그도 때가 되었는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탕자에게 말씀하듯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가라고 부르신 것 같다. 상담한 후에 회개의 기도를 시키고 같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할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방법을 찾겠노라고 하며 떠나갔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어릴 때의 상처는 매우 중요하다. 꼭 선교사의 자녀뿐 아니라 목회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회도 중요하지만 자녀 역시 부모의 돌봄이 필요하다. 부모의 사랑을 공급 받지 못한 자녀가 때로는 심한 마음의 아픔으로 성격이 부정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 예를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동급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총을 난사하는 것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학생들이 자기 친구들을 성매매 시키는 사건들도 들을 수 있다. 어떤 가정에서든지 자녀에게 관심이 없다든지, 눈높이 교육이 없는 이상 이러한 일들은 반복되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믿음의 가정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사랑과 행복이 있어야 할 가정이 폭력과 폭언이 난무한 가운데 눈물로 지새우는 가정도 많이 있다. 필자는 이번 상담을 통해서 지금도 선교사 사역에서 아니면 목회자 가정에서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다시금 자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녀란 신이 내려준 수수께끼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의 수수께끼를 다 합친 것보다 풀기 어렵다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자녀들의 마음이고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자녀들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수수께끼의 답을 부모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답을 풀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 도달하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무시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건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녀들은 그럴 때마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자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자녀들에게 부모들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또 다른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다. 규율과 규칙을 정한다. 압박을 한다. 그러다보니 자녀들은 부모들과 친밀감이 아닌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녀들이 할 것이라곤 거의 한정되어 있다.


자기가 마음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찾게 된다. 그곳이 어디겠는가? 자녀들은 이런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 원망을 한다. 어떤 아이들은 포효(咆哮)를 한다. 로널드 롤하이저(Ronald Rolheiser)는 이렇게 말했다.


자녀들을 바라보는 단순한 행동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기심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자녀들을 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인정할 때 그리고 욕심을 버릴 때 자녀들은 새로운 자존감을 생성(生成)해 나갈 것이다. 이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시고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어 그들의 방에서 나와서 친밀감으로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보기를 기대해본다.


이규호 목사  

처음사랑교회

행복가정치유상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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