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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테라피 11>

과거와의 화해


어느새 2013년이라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신년이 되었다. 새해를 맞으면 우리는 참 많은 새로운 결심들을 한다. 새로운 목표, 새로운 관계,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꿈꾸며 새로운 계획으로 부푼다.


올해는 성경 통독을 하리라는 결심에 별반 벗어나 보지 못한 창세기를 다시 펼치기도 하고, 배에 왕()자 근육을 다시 꿈꾸거나 다이어트를 선포하며 헬스장에 발을 딛기도 한다. 올해는 기어코 결혼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소원해진 가족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을 수도 있다.


새로운 시작은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하기에 참 좋다. 그런데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에 문득문득 우리의 생각, 혹은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의 과거이다.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경험들이다.


나를 배신했거나 상처 주었던 누군가의 존재가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방해하는 복병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고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불행이 또 반복될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다시금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기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뼛속까지 사무친 과거의 기억들로 만들어진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담자로서 우리를 거쳐 갔던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 기억을 털고 일어나야 하는지, 왜 다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감히 조언할 수 없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상담소를 찾아온 A씨는 아주 심한 강박증(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을 호소했다.


지문이 닳을 정도로 손을 씻어야 했고, 무엇이든지 똑바로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으면 숨이 막히게 화가 났다. 하루 종일 쓸고 닦아도 성에 차지 않았고, 아무리 빨래를 반복해도 깨끗한 느낌이 없었다. 몇 주간 강박증의 증상 자체를 주로 이야기하던 차에 자신이 씻어내고 싶어하던 과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폭력문제로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가 밤낮으로 혼자 일을 해서 남매를 키웠다. 이 남매는 늘 집에서 남겨져 있었고, 그 사이 A씨는 친오빠에게 지속적인 성폭행과 매를 맞았던 것이다. 이런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A씨는 누구에게도 문제를 말할 수가 없었다. 오빠에 대한 증오감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다. 필자는 그 분에게 오빠를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최근 또 심한 우울증으로 상담소를 찾는 C씨는 아버지의 이야기만 나오면 멈추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에게는 이복형제들이 25명쯤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일을 한 적이 없단다. 이 분의 아버지는 이 여자에서 저 여자에게로 옮겨가며 그들의 수입에 의존해 살았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자식들에게 양말 한 짝 하나 사줘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쪽으로도 10명쯤의 이복형제들이 있었다. 마약에 중독되어 있던 어머니는 자녀들을 돌볼 수가 없었고 C씨를 비롯해 다른 형제, 자매들은 양가의 할머니나, 이모, 고모, 삼촌들의 집으로 흩어져서 자라났다. 그 와중에 학습장애가 있던 C씨는 끝까지 글을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세 자녀를 둔 C씨는 자식들을 자신의 손으로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해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버지와 마주쳤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들, 즉 손주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동안 누르고 참아왔던 서운함과 미움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터진 울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 아버지,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 부모를 용서하고 다 잊으라는 말이 과연 이분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관계에는 꼭 넘어가야 하는 고비가 하나 있다. 나의 과거와 화해하는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치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을 ‘Radical Accept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실을 이제는 급진적으로, 극단적으로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나의 과거를 나의 한 일부로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나의 아픔도, 나의 고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나의 상처나 고통을 있었던 사실로 받아들일 때, 더 이상 나 자신과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나 자신을 부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받아들임의 작업에서 한 걸음 더 앞서 과감한 용서로 나아간 우리의 믿음의 선배가 있다. 바로 요셉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고, 형제들에 의해서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형제들 때문에 노예가 됐고, 형제 때문에 감옥에도 갔다.


상담소에 요셉이 찾아와 형제들의 시기심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었고 외국으로 쫓겨 와서 범죄자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형제들을 고소해서 감옥에 보낼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말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셉은 상처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신을 죽도록 미워했던 형제들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한 고백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7-8)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역사적인 안목이 있었다.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았고,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의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과감한 용서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제 2014년의 문턱에 섰다. 새로운 날들 앞에서, 새로운 관계들 앞에서, 한 걸음 나아갈 때가 되었다.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던 지난날들과 화해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 없지만,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미움의 감옥에서 우리를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


그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동행하심이 있었다는 확신만이 그 감옥 밖으로 우리는 나오게 할 수 있다. 우리를 어떤 순간에도 절대 놓지 않으셨던 그 사랑에 의지할 때에만 과감한 용서, 과거와의 화해가 가능해진다.


심연희 사모

RTP 지구촌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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