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다. 이 양떼들은 무리가 커지면 이상한 집단행동을 한다. 조금이라도 앞서서 풀을 뜯으려고 서로 달리기 시작한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수천마리 양떼들이 풀 뜯을 시간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뛰기만 한다. 그러다 해안가에 도달하면 갑자기 설 수가 없어 모두 바다로 뛰어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다. 21세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시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정글의 법칙(The law of the jungle)을 넘어선다. 무한 경쟁이요 전 방위 경쟁이다. 이것은 결국 무한탐욕으로 이어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한국은 더 심한 것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에 ‘더 나은 삶(OECD Better Life)’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4개국 OECD회원국을 포함한 36개국 국민들이 살아가는 상태를 분야별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은 종합 27위에 머물렀다. 그 중에서도 근로시간과 여가 활동을 토대로 집계한 ‘일과 삶의 균형’ 분야에서는 최하위권인 33위였다. 주간 노동시간은 44.6 시간으로 터키를 빼고는 가장 길었다. 무슨 말인가?
질문이다. ‘아프리카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이 질문에 순간 머리를 굴려가며 축척된 지식을 동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아프리카는 국가가 아니라 대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모를 사람이 있겠는가? 2001년 6월 14일 스웨덴 요텐베리에서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Africa is a nation that suffers from incredible disease”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옮기면 이렇다. “아프리카는 엄청난 병을 앓고 있는 국가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아프리카는 대륙이므로 nation이 아닌 continent를 사용했어야 맞다. 그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실수를 부시즘(Bushism)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엉터리 영어를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본뜻과는 다른 의미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diet’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특히 뚱뚱한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대명사 같은 단어가 되고 있다. 이 diet가 살을 빼는 행위나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diet의 본래 의미는
강원도 정선군 태백시 소재의 함백산은 해발 1,574M이다. 함백산 주름은 동쪽의 태백시와 서쪽의 영월 정선군의 경계를 이루며 뻗혀있다. 2013년 침레교 총회에서 여는 목회자부부 영적성장대회가 열리는 오투리조트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는 고원지대의 산행길이었다.“웃음” “회복” “도전”의 주제로 열린 102차의 침례교 한마당의 잔치는 행복했고 즐겁게 함께 웃는 전국 목회자부부 친교의 날이었다. 모두가 느끼는 것은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고원의 도시, 산소의 도시, 바람의 언덕, 안개의 도시를 와 보겠는가’는 것이다. 새벽부터 달려온 동청주지방 사모님들의 선발팀과 임원 목사님들의 사모님들이 여러 가지 준비 작업을 도울 수 있었으며 화합의 차원에서 가슴에 달린 노란 ‘스마일배지’는 연신 미소를 머금게 했다.5월은 행사가 많은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 가정적이며 은혜를 보답하는 가정의 달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인지 교회나 모든 기관들에서도 바쁘게 지내는 일상들로 동선이 넓혀져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교단에도 중요한 행사들이 영적 성장대회 책자에 광고로 나와 있었다. 5월30일-6월1일의 제23회 침례교 원로목사부부 초청 위로
부부도 서로 이해 못하는 시대이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그대 있음에 / 내 맘에 자라거늘. / 오,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 나를 불러 손잡게 해(김남조의 시, ‘그대 있음에’)우리는 얼마나 남의 근심을 위로하고 남의 고독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는가? 에리히 프롬은 남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해하다’는 영어 단어가 ‘understand’ 아닌가!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서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래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절실한 사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인생을 살아오면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를 이해해 준 사람이라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인생의 험한 고비를 넘을 때,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이해한다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어준 사람, 그 사람이 가장 고마운 사람인 것을…. 우리는 얼마나 내 주변 사람을 이해하고 사는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내 친구, 그리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이해하고 위로하며 사는가? 왜 우리는 바쁘다는
지난 달 말 미국 센트럴플로리다대(UCF) 서비스경영학과의 정모 조교수가 수업 중 “너희들 다 죽어가는 표정인데, 내가 지금 무차별 살인(killing spree)이라도 저지르는 거야, 뭐야?”라는 발언을 했다가 한 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이에 대해 정교수는 “당연히 농담이었다. 학생들도 함께 웃었다”라고 징계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징계는 철회되지 않았다. 최근 수원의 한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부적절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인권위원회의 징계를 받고 법원으로부터는 그 징계 조치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목사는 설교 중 “하와가 사과 2개를 몰래 따서 삼켰는데 씨앗은 소화가 안 돼 뱃속에서 점점 올라와 이것이 가슴이 됐다”며 “여자의 치마와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다. 이에 성적 굴욕감을 느낀 성도가 인권위에 진정을 했고, 인권위는 목사의 언행이 성희롱이라고 판단했고, 해당 목사는 “성희롱 의도가 없었고, 혐오감을 느낄만한 언동이 아니었다”며 인권위의 징계조치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했지만 법원은 “언동이 성경과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여성의 노출과 신체를 비하하는 내용이었던 점 등에 비춰 이로 인해 신도들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고
오늘도 자유로이 흐르는 한강을 지난다. 전철의 창가에서 보이는 가장 사랑스런 벚꽃나무 가지에 연분홍 꽃잎을 매달고 서있는 한강변의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활짝 핀 벚꽃 구경하기 위해 서울의 시민들은 여의도를 향해 나들이를 나서는 봄이 아닌가. 그곳에 우리 총회의 빌딩이 건축되어지는 것에도 감사를 드린다.얼마 전까지 우리는 어디서나 앉으나 서나 전쟁의 소문으로 한반도는 어려운 난국에 처해 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될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세계 종군기자들이 280여명이 몰려와서 전쟁이 일어날 때의 ‘특종’를 위하여 체류하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다. 외신에서는 한반도에서의 최악의 분위기가 고조 되어있다고 보도했고, 언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계의 화약고로 전쟁의 소문은 널리 퍼져있었다. 언제 북쪽 지도자의 오판으로 미사일을 발사할지 세계의 눈이 집중됐다.전쟁의 소문이 늘어갈수록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것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이다. 성경 속의 구약의 스토리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위기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께 나라를 위하여 간청할 때마다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펴주셨
1793년 단두대를 붉게 물들이며 루이16세를 처형한 프랑스 혁명정부가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 언급됐던 ‘자유’, ‘평등’, ‘권리’는 1875년 ‘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자유, 평등, 박애’로 바뀌게 됐다. 그리고 1973년 파리시 집정관 회의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만큼 사람을 매혹시켰던 이러한 이념들은 창세기 11장의 니므롯을 연상케 하듯이 철저한 인본주의라는 거대한 거인 우상을 탄생시켜 세상을 지배하게 했다. 소위 ‘인간존엄’이라는 그럴듯한 가치들이 세상의 중심 가치로 자리 잡으며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세상은 사람 냄새로 진동하게 된 것이다. 세상이 그토록 칭찬하며 노래하는 ‘자유, 평등’이라는 말은 지극히 저항적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그럴듯한 다른 모양으로 우리 곁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들이 외친 ‘자유’는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물론 당시 혁명 이전 앙시앵 레짐 체제 하에서 제1계급이 추기경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이었으니 어쩌면 이런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간단하지 않은 생각들이 사람들의 내면에 당연함으로 자리 잡았다.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그 아래 급인 왕(
기도하면서 이 글을 쓴다.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교회들을 비난하는 것 같아서이다.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만 있고 너는 없자는 것이 아니다. 치킨 게임(chicken game)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마주보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간이 약한 사람이 피하자는 것도 아니다. WCC 제10차 총회가 오는 10월 부산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조국교회는 뼈아픈 상처가 있다. 장로교단이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 가입 문제를 놓고 둘로 갈라졌었다. 지금의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 그 때가 1959년이다. 지금 또 다시 그 사건이 다른 각도로 재현되면서 조국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얼마 전, 부산 기독교 총연합회가 2013년 부활절 연합예배 설교자로 서울 M교회 K목사를 초청했다. 그러나 부산 보수 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초청이 무산되기도 했다. 하늘의 교회(the general assembly)는 영광스럽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the local church) 는 불완전하다. 고린도교회도 교회다.
섬진강가의 매화마을에 진분홍의 홍매화와 노란 산수유꽃들이 피어나고 진해의 군항제의 소식에 이 강산의 봄은 활짝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 평택의 하늘을 날고 있는 미 B-52폭격기의 비행 사진을 보고 다시 한국전쟁의 비극이 상기됐다.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협박에 대해 미국의 한반도 방위공약의 일환으로 핵우산 제공을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있다”고 국방부대변인이 밝힌 기사를 보고 성경 속의 말세가 점점 가까워 옴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포격땐 이렇게 대피하렴.”라는 제목으로 백령도 연평도 등 서북도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는 생활 속에서 백령초등학생들이 사이렌 소리에 교사와 함께 대피소로 훈련하는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며 대피하는 신문의 사진을 보고 마음이 떨려 옴을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 충청도의 농촌 마을에서 B-29의 폭격기가 나즈막하게 하늘에 굉음을 내면서 나를 때 논바닥에 납작 엎디어 귀를 막고 떨고 있었던 유년의 아픈 그림들이 되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류동 총회회관의 지하 사무실 옆 침례탕에 만들어진 유리벽의 창가에 사모님들이 사무실에 들릴 때마다 갖다 놓은 봄의 전령 노란 수선화꽃과 분홍색 제
‘선도’, ‘홍도’, ‘국도’. 섬 이야기가 아니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세습의 본을 보인 이후 그의 형제들은 용감무쌍했다. 심지어 교단적으로 세습을 금지하는 법안이 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법을 교묘히 악용하는 편법 세습을 임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가 제사장은 계승하는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교계와 사회의 비난을 무시해가며 강행하고 있다. 정말 ‘섬’ 같은 사고방식들을 가진 형제들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자신의 생각만 옳으면 된다는 뚝 떨어져 있는 섬 같은 의식구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로 인해 교계나 한국 사회는 떠들썩한데 그들의 눈과 귀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토록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서울의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가 횡령의 혐의로 드디어 2년의 실형을 받았는가 하면, 교회 건축 과정에서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사랑의 교회가 또 다시 대형사고를 냈다. 오정현 목사가 뜨거운 시선을 받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는 지난 1998년 남아공 포체프스트룸대학에서의 신학박사 논문에서 약 30%의 표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5년 미국 바이올라대학 탈봇신학대학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