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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달비(딴머리), 그리고 섬김과 나눔

이정일 목사
청하교회

매년 찬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주변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는 나눔과 돌봄을 위해 언론매체들은 사회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나는 섬김, 나눔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 어머니의 달비(딴머리) 머리다.
지금은 가난이 내게 위대한 선생이 되었지만 유아시절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서준 과도한 빚보증 때문에 집과 모든 재산, 가재도구들이 집단리에 의해 모두 경매처분 되어 갑자기 가난이라는 것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우리 식구들을 덮쳤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부모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했던 최후의 끈이 “내 어머니의 달비”였다.


까마득한 기억의 어린 날, 친정어머니께서 큰딸 시집보내면서 반닫이 느티나무 농 밑에 고이 넣어 주셨던 대장장이가 정성껏 만든 까만 가위를 새벽기도 드리고 와서 곱게 갈아 옆에 놓고 어머니께서는 그 일을 하실 때는 꼭, 잠에 취한 어린 나를 깨우셔서 앞에 앉히고 둥근 체경(거울)을 손으로 잡게 하고는 비녀를 뽑은 삼단 같고 칠흑 같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앞으로 곱게 넘겨 빗으시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조금씩 여기저기를 잘라내셨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이 보이지 않게 동백기름을 곱게 바르고 빗질을 하시고 이마로부터 정수리까지 가르마를 타고 쪽을 트신 후 비녀를 꽂으셨다. 그리고 달비를 가지런히 간추려 끝부분을 고무줄로 꽁꽁 묶어 창호지에 정성껏 말아 반닫이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셨다.


이 일을 일 년에 서너 번 반복하면 어머니의 달비가 어린 내 손목보다 굻어질 때면 어김없이 찬 겨울이 다가온다. 그 때가 되면 달비를 사는 아저씨가 “다 알 비 삽니다. 다 알 비”를 외치면서 동리를 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일아 달비 장수 아저씨 불러와”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흐뭇한 모습으로 달비를 내주고 돈과 바꾸셨다. 바로 그 돈이 세상에 무엇과도 바꾸지 못하는 내 어머니만의 섬김이고 나눔이었다.


현대인들에게 세찬이라는 말이 어색하겠지만 세찬이란 설이나 새해를 맞아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만드는 음식이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께서 달비를 팔아 준비하는 세찬은 특별했다. 그것은 할아버지 할머니께만 드려지는 음식이었다. 절편을 만드시는 상 앞에서 기다리고 앉아 마지막 떡 꼬리 하나를 맛보려 해도 맛볼 수 없었던 것이 내 어머니의 세찬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소천하신 후는 큰 외할아버지 그 후는 경로당 어르신들의 몫이 된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달비 판 돈의 일부는 꼭, 목회자의 와이셔츠가 된다.


그리고 우리 동네는 일 년에 두 번, 추석에 한 번 설에 한 번 큰 행사가 치러지는데 소를 잡는 날이다. 소를 잡는 날은 동리 아저씨들이 고목나무에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매놓고 도끼머리로 소의 숨골이 있는 부분을 마구 내려친다. 아마 아마추어들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어머니의 달비판 돈은 쇠고기 한 근을 사는 것으로 끝이 난다. 평소 어머니의 후한 성품을 아는 이웃 아저씨들은 쇠고기 한 근을 넉넉히 끊어 주시고 덤으로 먹을 수 있는 쇠기름까지 주신다. 그때부터 나는 지난해 그리고 저 지난해에 내가 당한 경험으로 불안해진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마을에 가장 가난하고 사람들이 피해 가는 집이 냇가 건너에 살았는데 돌로 지어진 움막 비슷한 집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집 어른을 빗대어 조롱하는 노래를 재미로 부르며 그 집 아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놀렸다. 흥부 네가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집도 아이들이 만만치 않게 많았다. 그 집 아저씨는 담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이들은 길과 동네쓰레기장에서 담배꽁초를 줍는 게 일과였다.
설날 아침 어머니께서 끓이시는 쇠고기 국 냄새는 어린 나를 마구 흥분시킨다. 입에서 한참 침이 고이는 순간 여지없이 어머니는 “일아, 저 건너 OO씨댁 식구 밥 먹으러 오라고 해 빨리 갔다 와”그 순간 그 흥분되던 내 감정은 싸늘하게 식고 내 발은 천근만근이 되어 그 집 거적문을 옆으로 밀치고 들어가면 싸늘한 돌집의 냉기가 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리고 힘없이 내다보는 꼬질꼬질한 때가 묻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나를 쳐다본다. 그 대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오는 날 그 좁은 우리 집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더 비좁아지고 그 맛나게 보이는 쇠고기 국은 기름으로 보기만 그럴싸하고 그렇게 먹고 싶은 쇠고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길이 없어진다. 세월이 흘러 아흔이 넘으신 노구를 이끄시고 막내아들이 섬기는 교회를 출석하실 때, 자녀들이 용돈이라도 드리면 그 용돈은 어머니의 새로운 달비가 된다.


지난 주일에 교회 오셔서 누가 입성이 험한지, 누가 양말을 험한 것을 신고 왔는지 어떤 자매가 얼굴이 푸석한지 눈여겨보셨다가 다음 주일이 되면 그 용돈이 성도들의 옷이 되고 양말이 되고 로션이 되어 아들들 모르게 가방 속에 몰래 넣어 오셔서 예배 후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그머니 건네주는 모습을 애써 외면했던 어머니의 영원한 달비, 그분의 섬김과 나눔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난독증을 가지셔서 남보다 글을 잘 읽지 못하시고 일생을 사셨지만 그분의 삶이 곧 섬김이었고 나눔이셨던 것을 지금 생존해 계시는 노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내 어머니의 달비로 샀던 그 옷을 입으시고 강단에 서셨던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은 그 옷이 우리 어머니의 한올 한올 잘라서 판 달비로 섬긴 옷인지 모르실 것이다. 어머니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천국으로 가시고 안 계신데 올해도 여지없이 찬바람이 불어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