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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가정, 유리로 만든 집


생각해보면 목사라는 것처럼 이상한 직업(?)도 없다. 많고 많은 직장과 직업 중에 목사처럼 배우자와 아이들까지 철저하게 드러나고 온 가족이 남편의 일터에서 함께 하는 직업은 본 적이 없다.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며, 교회가 직장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온 가족이 목사와 함께 사역에 참여하고, 더불어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도 여느 직업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 사모님께서 자신을 BOGO(Buy one, Get one free), 즉 하나 사면 하나 끼워주기처럼 목회자에 묶인 세트로 부르시는 말씀을 듣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웃자고 한 농담이었지만 왠지 생각하면 씁쓸해지기도 한다. 미국 사람들이 사모를 ‘First lady’라고 부르는 것을 종종 듣는데 어찌 보면 대통령의 아내와 비슷한 기대가 반영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단 월급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겠지만목회자의 아이들도 어느새 자기 또래나 어린 아이들을 챙기고 돌보는 데에 익숙해져 가고 babysitting은 전문가 수준이 된다. 심방을 갈 때에도 목회자의 자녀들은 거의 어린이 사역자의 역할을 한다. 돕는 것이 몸에 배어가는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서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복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싸하게 아릴 때가 있다.


한 목사님의 블로그에서 목회자 가정이 갖는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리집 신드롬(Glass House Syndrome)이다. 목사뿐만이 아니라 사모와 자녀들이 유리로 만든 집에 사는 것처럼 사생활이 공인처럼 드러나고 관찰과 평가의 대상이 되면서 목회자의 가정에 주어지는 스트레스를 말한다. 집이 남들보다 작아도 궁상스러워 보일까 걱정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인들보다 집이 조금만 커도 이유 없이 미안하다.


집이 지저분하면 게으르다 할까 겁나고 너무 깨끗하면 결벽증이라 할까 조심스럽다. 허름하고 유행 지난 옷이면 촌스럽다 할까 신경 쓰이고 고급스러운 옷이면 사치스럽다 할까 무섭다. 음식이 맛없으면 사모가 기본이 안됐다 할까 쩔쩔매고, 음식을 잘하면 다 알아서 하라고 뒷짐 질까 싶어 피곤하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덕이 안 된다고 할까 두렵고, 공부를 너무 잘해도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성도 앞에서 잘난 척 한다 할까 말도 못한다.


일을 많이 하면 나댄다 할까 주춤거리고, 뒤에 물러나 있자니 하는 일이 뭐 있냐고 할까 쉬지도 못한다. 연예인도 아닌데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럽고 도마 위의 생선처럼 언제 회로 쳐질까 긴장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와 그 가족이 편안하고 쉬고 충전해야 하는 가정은 꽤 자주 사역의 현장으로 변한다.


한밤 중에 부부싸움하고 뛰쳐나온 아내들의 임시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이사 가는 성도들이 짐 부치고 신세지는 친척집 역할도 한다. 아버지에게 맞고 집을 나간 사춘기 아이를 데려와 재워야 하는 방공호로 변하기도 하고, 죽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교인들을 위한 상담소이기도 하다.


라면 봉지 들고 무턱대고 쳐들어와 냉장고를 싹 비우고 가는 청년들은 그래도 양반이다. 하다못해 골프 치러 가면서 애를 맡기러 들르는 유치원이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옛날 순수했던 목회초기 시절, 가정을 활짝 열어 교회와 성도들을 돌보겠다고 하나님께 드렸던 약속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무르고 싶다.


유리로 만든 집에 살면서 긴장하고 걱정하는 목회자나 그 가족에게 뭘 그리 쓸데없이 신경을 쓰냐고 타박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많이 민감하고 비판에 자꾸 상처받으면, 이 유리집처럼 견고하고 살벌한 감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까지 성도들이 자꾸만 적당한 선, Boundary을 넘어오게 될 때, 목회자의 가정은 가리고 싶은 부분까지 다 드러낸 문 떨어진 공중 화장실처럼 느껴지게 한다. 요즘은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목회자가 대세다.


자신의 약한 점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성도들의 일반적인 갈등과 고민에 공감해주는 목사를 사람들은 찾는다. 그러나 막상 목사의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 그것을 다 감당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도들은 지극히 드물다. 화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목회자의 모습을 보면 의지할 데 없는 아이처럼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권위적인 목사보다는 인간적인 목사를 찾으면서도 너무 허물없는 것은 부담스러워한다. 가정을 수시로 열고, 온 가족이 목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바랄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와 휴식의 부족으로 탈진되어 있으면 자기 관리의 부족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늘 난감한 것이 목회자와 그 가족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갈등이 우리에게 지혜의 문을 열게 하기도 한다. 수도 없는 갈등 가운데서 우리는 중심을 잡는 법을 배운다. 제일 먼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는 것이다(Acceptance).


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상담자에게 자신의 가장 깊이 숨은 고통과 갈등을 드러내는 것부터 그 치유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수치스러운 감정까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상담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변화를 추구할 힘이 그 사람 안에서부터 솟구친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는 상담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를 받고, 듣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목회자와 사모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목회자가 목회자와 사모, 그리고 목회자 자녀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고,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대로 존재할 때, 그래서 약한 듯 보일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 인해 강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심 잡기는 균형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Balance).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되, 상대에게 부담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다. 가정을 열고 섬기되, 자신을 충전하는 시간을 소중히 알고 ‘No’할 줄도 아는 것이다. 성도들과 진심을 나누고 열심히 사랑하지만, 너무 기대지 않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역하되, 쉬어가야 할 때 쉴 여유를 갖는 것이다.


복음을 지키고 전하는 일에 고집스럽지만,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유별난 모습과 성격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중심을 잡는 것이 참 쉽지 않지만, 이 균형이 무너질 때 우리의 교회와 가정, 그리고 목회자 자신에게서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가장 궁극적인 중심 잡기는 역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굳은 믿음에 있다. 유리집안에서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고, 그들의 평가에 분노하고, 비판에 가슴 아파하다보면 우리의 선배 목회자들의 뻔한 잔소리(?)가 비로소 목회현장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에게 양약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시선이 유리집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을 때는 세상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목회자와 가족을 공격하는 적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맞추어 질 때 우리의 가정은 구원의 사역을 위해 쓰임 받는 반석 위의 집이 된다. 어떤 비바람에도 거뜬하게 사람들을 품었다 내보내는 방주가 된다.


심연희 사모

RTP 지구촌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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