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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기독론 : 로고스 기독론(4)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다루는 로고스 찬미가 첫 단락에서 그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로고스(말씀)로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연합의 관계를 가진 신성의 존재라는 것과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권위와 능력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했다. 요한은 특히 그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된다는 것을 통해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실행자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요한은 ‘생명’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존재(요 5:26)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요 5:26; 11:25; 14:26)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며(요 3:16; 8:12; 10:10; 17:3) 또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요 2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으며(요 5:26),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요 10:10), 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 20:31).


요한은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것의 결과를 비유적으로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취되 어두움이 전혀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요한은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취는 것으로 여러 차례 말했다(요 8:12 3:19; 12:35, 46). 어두움은 빛의 상대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어두움과 빛의 상징성만큼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어두움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내면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거절하게 만드는 영적 세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요한은 인간의 어두운 내면 상태는 죄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달한다(요 8:21, 24). 그런 의미에서 어두움은 밤(요 9:4; 11:10)과 죄와 연결되기도 하며 또 부정적 의미를 가진 세상과 연결된다(13:19-21; 9:39; 12:46).
요한은 이 구절에서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취고 있다’라는 현재 시제를 사용해 “그가 세상에 계셨다”(1:10)와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다”(1:11)라는 구절에서 사용한 과거 시제와 구별한다. 이것은 빛으로서 로고스의 영원한 속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빛의 속성 곧 빛은 빛이기를 그치지 않는 한 빛을 발산하는 일을 그칠 수 없다는 점을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활동의 지속성과 영원성을 나타낸다.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지속적으로 비추고 계신다는 것이다. 요한은 빛의 이러한 지속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이 빛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제시한다.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빛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은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한 이유를 성육신하신 로고스의 실제 사역의 결과를 통해 더 분명하게 제시할 것이다(요 1:10-11). ‘깨닫다’로 번역된 동사는 ‘이기다’(overcome)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라면, 이 구절은 “어두움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빛과 어두움의 대결에서 빛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거부와 반대와 배척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빛의 역사는 어두움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서에서 반석 위에 세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16:18)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어두움은 빛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또 빛의 활동을 막지도 못한다. 요한은 빛과 어두움이라는 이분법적인 우주적 현상을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표현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로고스의 활동을 생명과 빛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이어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관하여 제시한다(요 1:9~13). 요한은 로고스의 우주적이며 영원한 국면으로부터 로고스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묘사로 진행한다.


요한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참된 빛의 오심으로 묘사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다”(요 1:9). 요한복음서 저자의 용어 사용에서 형용사 ‘참되다’는 단어는 어떤 견해나 진술의 비진정성에 대한 진정성 그리고 거짓에 반대되는 참됨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법정 용어라는 것이 암시된다(4:37; 7:28; 8:16; 19:35). 참되다는 것은 순전한, 진정한,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형용사를 “참된 빛”(1:9), “참된 예배자”(4:23), “참된 떡”(6:32), “참된 포도나무”(15:1), 그리고 “참된 하나님”(17:3)에 적용한다. “참된 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진정한 빛”이다. 침례요한도 하나의 빛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5:35), 그러나 그는 참된 혹은 진정한 빛은 아니었다. 참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진리와 관련된 것이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취다”라는 말은 로고스의 성육신과 세상에서 그것의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선언한다(12:46). ‘비취다’는 말은 “내적으로 조명하다, 교육하다, 혹은 지식을 제공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참된 빛이 각 사람에게 비췬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참된 빛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절(요 1:10)에서 언급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 빛에 대한 자연적이고 보편적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서 빛은 구원의 기능 뿐 아니라 심판의 기능을 갖는다. 빛은 그것에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길이 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다가온다.


요한복음서에서 ‘세상’은 자주 나오는 중요한 단어인데 그것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중립적 의미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3:16). 다른 하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경우에는 주로 지시 대명사가 사용되어 “이 세상”이라는 구절로 사용된다(8:23; 9:39; 11:9; 12:25, 31; 13:1; 16:11; 18:36). “이 세상”은 종말론적 미래의 세상과 대응하는 것으로서 “현재 세대”를 가리키며 또 이상적이고 영원한 위의 세계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아래 세계”를 가리킨다(8:23; 18:36). 그래서 “이 세상”은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알지 못하며 또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한다(1:10; 7:7; 14:17, 22, 27, 30; 15:18f.; 16:8, 20, 33; 17:6,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현장이다(1:9-10; 3:17, 19; 6:14; 8:26; 10:36; 12:46; 16:28; 17:13; 18:20, 37). 세상에 대한 또 세상을 위한 그의 사역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고 영원한 사랑에 기원한다(3:16).


요한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언급들이 나온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고 언급되기도 한다(4:42; 1:29; 6:35, 51; 8:12; 9:5). 또 그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언급된다(3:17; 12:47).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왔다”(9:39; 12:31) 또한 “이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왔다”(16:33)라고 언급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임금은 장차 쫓겨날 존재로 언급된다(12:31; 14:30; 16:11). 그러나 이런 언급들이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지만, 그 구원에 참여하든지 혹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빛을 대하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빛을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여전히 이 세상의 임금 아래 남아있기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7:21, 23). 그러나 그의 사역의 결과는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을 낳게 된다(1:10; 14:17; 17:25).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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