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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문학적 특성을 고려한 설교실제 - 3

문상기 교수
(침신대 신학과(설교학)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라고 물었던 것처럼, 설교자는 비유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비유를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하나의 비유가 그 콘텍스트 안에서 무엇을 말하기 위해 기록됐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현대 청중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는지를 진지하게 찾아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유를 해석하기 위한 세 번째 관점은 비유 현장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에게 어떤 감동이 있었는지, 당시 현장에는 어떤 정황이 연출됐을까를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당시 청중을 연상하며 감정이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 비유,’ ‘포도원농장 일꾼의 비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등과 같이 대부분의 예수님의 비유는 반전 포인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원 청중의 감정적인 반응과 당시 그들에게 다가왔던 도전적인 교훈을 파악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수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와 지금의 상황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만큼이나 문화적 맥락의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해석자는 본문의 자세한 관찰과 그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정황에 대한 주의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이것은 존 스토트(John Stott)가 말한 본문의 세계와 현재 청중의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의 일환이다.


비유는 논증법적으로 귀납적 형식을 취한다. 이는 이야기가 주는 교훈적 의미가 마지막 종결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가 그랬듯이 비유(이야기)를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비유의 특성을 살려 이야기가 가지는 역동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 청중은 성서 이야기에 친숙한 편이지만 설교자는 이야기의 반전이 일어나는 마지막 부분까지 역동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미스는, 비유란, 예수님이 어떤 명제로 여러 개의 요지를 주신 강의가 아니라 평범한 이야기에서 놀라운 결론으로 반전을 일으킨 이야기였기 때문에 설교자는 전략적으로 설교의 전반에 명제적 개념을 제시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특히 긴 비유를 설교할 때는, 결말에 대한 청중의 관심을 유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할 것을 주문한다.


3. 신학적 해석
신학적 해석은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좋은 소식, 즉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복된 소식이 복음서의 본질임을 일깨워 준다. 복음서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사건, 가르침과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밝힌다.


그 모든 내용은 주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과 깊이 연관된다. 이는 복음서의 저자들에게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한 인간 구속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복음서를 해석하는 설교자들에게 핵심적 관점을 제공하며 나아가 설교의 방향을 위한 중대한 지침을 내려준다. 


1)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예수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1:23)로 존재하심을 보여준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열면서, 예수께서 태초 창조의 때에 하나님으로 계셨으며 육신을 입고 자신의 백성 가운데 오셨다고 말했다(요1:1~14).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9).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말로 그의 책을 시작했다(막1:1). 복음서 저자들은 이처럼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면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 중심이 됨을 밝힌다.


랄프 마틴(Ralph Martin) 역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그 핵심임을 강조하면서, 복음서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의 스토리를 위해 기록된 것으로써 모든 복음서의 내용은 설교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복음서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인간 구속을 위한 결정적인 계획으로서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해석은 마땅히 그리스도 중심(Christocentric)이어야 한다.


네 권의 복음서 저자들의 저술 목적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을 밝히는 것과 깊이 연관되었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거한다. 그리고 모든 복음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육체적 부활에서 이루어진다. 나아가 복음서에서 예수의 중심성은 예수의 부활은 곧 복음서의 존재와 깊이 연관되고 있음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분이다. 복음서는 때로는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을 명백히 구분하여 말하지만,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복음서의 그리스도 중심 해석은 또한 하나님 중심(theocentric) 해석이다.


복음서가 독특한 형식을 가진 예수의 전기임을 고려할 때, 설교자들은 인물 중심의 스토리에서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들의 이야기 안에서 수많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이 이야기는 놀라운 내러티브이며 설교의 관점도 다양하다. 설교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을 떠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전략으로써 본문을 설교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즉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간절한 믿음에 관점을 두거나, 친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중점으로 설교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중심인물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설교자들이 언제나 유념해야 할 것은, 나레이티브의 전개 관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특징을 설교 주요 개념으로 드러내는 것은 복음서 저자의 핵심 의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초반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요2:1~11). 이 이야기 안에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했던 하인들이 등장하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간파하고 예수께 이 문제를 알렸던 마리아가 등장한다. 자칫하면 설교자들은 하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으므로 “순종”을 주제로 설교할 수 있다.


또한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가능하다. 5절에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하인들에게 당부했던 마리아의 말에 근거해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면 해결받는다고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에 핵심 사상이 담겨있으며 요한이 이것을 기록한 목적이기 때문이다(요20:31).


2) 케리그마
복음서는 특징적으로 본질상 케리그마로써 신약성서의 케리그마의 용법에 잘 나타나 있다. 신약성서의 케리그마의 특징은 그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이 복음은 대중적 선포와 긴밀히 연관된다. 복음서의 말씀은 선포된 메시지로써 복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복음의 선포자 이심을 보여준다(막1:14). 이처럼,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복음의 본질은 케리그마로서 선포된 메시지임을 보여준다.


마틴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복음은 ‘선포하다’ 혹은 그에 ‘반응하다’ 등의 동사와 연관됐으며 ‘기록하다’ 혹은 ‘읽다’와 같은 동사와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고 확언한다. 그리고 신약교회의 말씀 전도자들은 전령자, 복음의 선포자를 의미했고 펜을 들고 다니는 서기관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한편 그레이다누스는 복음서 저자들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저술 자료들을 선택, 정렬, 나아가 수정했음을 강조하면서, 그 목적은 복음을 그들의 청중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복음서의 장르적 특징은 또한 “기쁜 소식”을 가리키는 헬라어의 용어적 의미와 연관된다. 복음서의 저자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저술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죄의 용서와 영생의 선물을 베푸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물론 케리그마로서 복음의 선포는 심판의 메시지를 포함한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23장에서 ‘화 있을진저’란 말과 함께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통렬히 책망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때 심판의 선포는 회개와 용서를 위한 촉구로써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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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