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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의 북방선교-5

안희열 교수
침신대 신학과
(선교학)

IV.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과 북방선교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창립하면서 “교회본부를 원산에 두고 한국과 남북만주(南北滿洲)와 노령(露嶺) 시베리아 등에 전도지역을 확장할 것을 결정”함으로 시베리아 선교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노령(露嶺)의 시베리아란 펜윅이 순회전도자들을 파송했던 크라스키노(연추), 파르티잔스크(수청), 포시에트(목허우),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아누치노(도비허)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이다. 한편 본고에서는 연해주와 시베리아 또한 위의 러시아 도시명을 혼용할 것임을 밝힌다.


연해주의 한인 이주 역사는 1863년 함경북도 경흥의 농민 13가구가 굶주림과 억압을 피해 두만강 건너 포시에트(Посьета)에 정착한 시기로 본다. 이들은 최초의 한인 마을인 ‘지신허’(地新墟)를 포시에트 지역에 건설했고, 이후 1869년에는 기근으로 인하여 1만 명이 이주했고, 1906년에는 고려인 인구가 3만 4,399명이었다가 1914년에는 6만 3천 명으로 급증했는데 이미 1910년에는 비공식 이주민을 포함해서 연해주의 고려인이 8~10만 명 정도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연해주에는 1863년부터 고려인 정착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는데 크게 네 개 구역이 있었다: (1) 포시에트, (2) 블라디보스토크, (3) 수이푼·우수리스크, (4) 파르티잔스크. 바로 이곳에서 동아기독교가 교회개척에 힘썼다.


1.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과 선교
우선 동아기독교가 시베리아 교회개척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그림 “재러 동아기독교의 교회 분포도(1889-1949)”를 보면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은 크라스키노(연추)→파르티잔스크(수청)→아누치노(도비허)→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순으로 진행됐다.


재러 동아기독교가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은 연추구역이다. 1909년 2월 달미교회가 개척됐는데 이곳에서 교회개척이 빨랐던 이유는 대규모의 한인 마을이 연추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연추(얀치헤)는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로 1867년에 세워졌고 상(상 얀치헤)·하(하 얀치헤) 2개의 마을로 나뉠 만큼 큰 규모의 고려인 마을이 있어서 동아기독교가 선교하기가 쉬웠다.


이처럼 고려인 마을은 지신허를 시발로 연추(얀치헤)와 연해주 전 지역에 형성되어 1904년에는 32개의 고려인 마을이 형성됐다. 1914년경 연추는 400가구에 2000명이 거주했다. 함경도에서 지배층의 수탈과 압제, 기근과 굶주림은 이주로 이어져 이들이 정착한 연해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같았다.


두만강은 폭이 좁고 물길도 얕아 도강하기가 쉬워 많은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한인촌을 형성함으로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선교는 순항했다. 연추구역에서의 교회개척은 1909년부터 1912년까지만 진행됐고 그 이후로는 없었다.


둘째로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이 수청이다. 수청은 산악지대로 광산이 밀집되어 있었으며 농경중심의 포시에트와는 달랐다. 그런데 수청구역에는 18개의 교회가 개척되어 16개의 연추구역보다 많았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수청에서 교회개척이 잘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은 산악지대로 산골짜기마다 한인 마을이 형성됐는데 무려 13개가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동아기독교인들이 전도하기가 쉬웠던 것이다. 또한 이곳에 정착한 이주 한인들은 대다수가 가난한 빈농들이었다. 이들은 서쪽의 연추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고려인과는 달리 러시아 국적이 없어서 토지를 분배받지 못한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러시아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거나 임대하는 고용농민들이 태반이었다.


와그너에 따르면 교회개척이 잘 되는 지역 중의 하나가 하류층 주거지역인데, 이는 복음의 수용성이 높기 때문이다. 수청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연해주 중에서 도시보다는 오지 중에 오지였던 수청은 신앙선교와 순회선교로 똘똘 뭉친 동아기독교인에게는 축복의 땅이었다.


셋째로 도비허에는 1914년에 다섯 교회가 세워졌고 그 이후로는 개척되지 않았다. 도비허(Anuchino)란 수청의 4개 구역 중 하나였는데 “재정러시아 시기에 한인들은 통상 수청지방을 외(外)수청, 내(內)수청, 소자하(蘇子河), 도비허(都飛河)의 4구역”으로 나눠 불렸기 때문에 사실 도비허구역은 수청구역에 포함시켜도 된다. 그렇다면 수청구역에서의 교회개척은 무려 23개나 된다.


1940년 동아기독교 통계에 따르면 시베리아에는 2개 구역에 47개 교회가 있다고 알려졌는데 이정수가 굳이 도비허구역을 수청구역과 분리해서 첨가한 이유는 도비허(都飛河)가 1875년에 형성된 고려인 마을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도비허란 “아무르강의 남쪽 지류인 우수리강의 상류지류인 다우비허강 계곡 분지 일대, 즉 남부 연해주의 내륙지방”을 말하는데 이곳에 고려인촌이 형성돘기에 동아기독교는 도비허교회, 신한동교회, 북동교회, 대한동교회, 동흥동교회를 개척함으로 북방선교의 정신을 이어갔다.


넷째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은 1920년대에 모두 일어났고 5개 교회가 세워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 마을은 1874년에 형성됐는데 한인 이주자들이 급증하면서 1914년에는 6만 3000명의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新韓村)을 건설했다.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변두리에 형성된 새로운 한인 마을이었다. 신한촌 건설이후 블라디보스토크는 독립운동기지로 우뚝 서 항일민족운동을 배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 일을 핵심적으로 맡은 단체가 권업회(勸業會)였다. 신한촌이 건설되면서 연해주의 도시 중심축이 연추와 포시에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이 1910년대에 연추, 수청, 도비허에서 모두 진행됐지만 유독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없었고, 1920년대에 들어와서야 진행됐다는 점이다. 연구자의 판단으로는 동아기독교의 오지선교 정신이 시골이나 산골짜기에 위치한 연추, 수청, 도비허에는 잘 어울리지만 도시중심의 블라디보스토크와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 시베리아의 사도 바울,  최성업 목사와 최응선 감로
최성업 목사와 최응선 감로는 ‘시베리아의 사도 바울’이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이 만주와 시베리아에 개척한 교회 수가 무려 25개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로 한정한다면 부자지간(父子之間)이 개척한 교회는 21개(최성업 목사 7개, 최응선 감로 14개)로 전체 시베리아 교회 중 48%에 이른다. 즉 동아기독교가 시베리아 교회를 개척한 것 중에서 둘 중에 하나는 최씨 부자(夫子)가 개척한 것이다.


특히 최응선 감로는 아들 최성업 목사를 통해 회심한 후 주님의 제자가 됐는데 그는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 개척자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었다. 그는 14개 교회를 시베리아에서 개척했는데 이는 전체 32%를 차지해 시베리아교회 세 개 중 하나는 최응선 감로가 개척한 것이다.


최성업 목사와 최응선 감로는 북방선교 전략인 ‘3C’를 모두 보여준 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며 헌신(commitment)한 자들이었고, 북한, 만주, 시베리아를 돌아다니며 복음전하는 순회 전도(circuit evangelism)의 모델이었고, 교회개척(church planting)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일꾼들이었다.
 
3. 시베리아 4인 순교자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에는 순교의 값진 면류관이 주어졌다. 민경배는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교회사상 찬란한 그(펜윅)의 공헌은 간도와 노령(露嶺) 지역에 대한 선교 투신이다. 이들의 선교행각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거대한 사도행전이다. 순애보(殉愛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