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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 샤론의 꽃이

침례교총회 미얀마 선교집회 다녀와


고국에는 이제 곧 벚꽃이 만발할 것이다. 겨우내 검게 죽은 것 같은 나무 가지에 순식간에 피어나는 벚꽃들을 볼 때마다 부활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곤 했다.

미얀마는 열대 지방에 속하기에 벚꽃을 보기 어렵다. 226일자 쩨몬(청동거울)신문에서 미얀마 행정수도 네비도에 있는 의회로 가는 길 좌우편에 100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는 글을 보았다.

2020년까지 1000그루의 벚나무를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은 미얀마 정부가 민주화를 시도하면서 미국의 경제 조치가 풀리자마자 수 조원의 국채를 탕감해주고 미얀마 각종 개발권을 따내었다. 그러한 가운데 양국 우호협력의 상징으로 벚나무까지 심었다.


마사아끼 다까오카(1909~2001)라는 식물학자가 어떤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벚나무 품종을 개발해 냈다. 2025년쯤이면 미얀마 의회 건물 주변에 사쿠라가 만발하게 될 것이다.

미얀마는 한반도(219,020)의 세배 정도되는 국토(676,578)에 인구가 54백만명(2017)정도 되는 나라이다. 정부 공식 통계로 135개 종족이 함께 사는 다민족 국가이지만 주종족인 버마족(68%)과 샨족(9%), 라카인족(3.5%), 몬족(2%) 등은 99% 이상이 불교도들이다. 역사적으로 미얀마 내에 여러 민족의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영국이 미얀마를 3번에 걸친 전쟁 끝에 식민지로 삼았다.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의 띠보왕은 1885년 폐위당하고 인도로 유배됐다.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 통치하면서 인도에서 여러 종족들을 군인으로 하급관료로 노동자로 이주시켰고 주종족인 버마족을 견제하여 소수 종족인 친족, 카렌족, 카친족들을 군인으로나 하급관료로 등용하여 미얀마를 식민 통치했다. 영국의 식민 수탈이 심화되자 버마 청년들은 아웅산 장군을 중심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구미 식민주의 타파라는 명분으로 다가온 일본의 지원을 받아 영국군을 축출하게 된다. 하지만 대동아공영권의 허울로 철저히 수탈해가자 다시 영국과 손잡고 일본군을 물리치게 된다.


이후 아웅산 장군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 소수종족들과 연합한다. 소수종족들의 자치권을 약속하고 삥론 제2차 협약(1947.2.12)이라는 협약서에 소수종족 지도자들이 사인함으로써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어내게 된다.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독립을 얻기 전 7개월 전에 암살당하고 만다.

아웅산 장군 암살 이후에 들어선 버마 연방 정부로 시작한 버마정부는 점차적으로 버마족 중심의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확장해 1962년에는 버마 연맹 사회주의 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of the Union of Burma)을 천명하고 소주 종족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게 된다.



한편 1813713일 버마에 도착한 아도니람 져드슨 선교사 부부가 수많은 고난 속에서 사역해 1823년 신

약성경 번역을 마쳤지만 그의 전도를 통해 믿게 된 신자는 20명이 채 안되었다.

버마 왕정은 불교도들의 전도를 어렵게 했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서양 선교사들을 모두 스파이로 몰아 투옥시키고 미약한 교회마저 핍박하여 흩어지게 했다. 그 과정에 아내와 자녀들을 잃게 된 져드슨 선교사는 좌절하여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다.

주의 은혜로 극한 슬픔을 극복한 뒤 1827년 져드슨 선교사는 양곤을 떠나 남쪽 몰레먀잉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전도한 버마족 한 신자로부터 꼬따퓨라는 카렌족 한 사람을 값을 치루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줬는데 이 사람이 변화되어 죠지 버드만 선교사 부부와 동역하면서 카렌족 사이에 복음이 들불처럼 번지고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그 과정 중에 카렌족 문자가 제정되고 성경이 번역되면서 문맹이었던 카렌족들이 글을 알게 되고 자기말로 성경을 갖게 되며 학교 교육을 받게 되어 영적으로 지적으로 놀랍게 성장하게 된다. 불경을 통해 오랜 문어 전통을 가진 버마족으로부터 글 모르는 짐승과도 같이 무시당하던 카렌족이었다.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카렌족들은 1866년 들어온 미국 침례교 죠시아 쿠싱(Josiah N. Cushing) 선교사가 샨족 선교를 위해 떠날 때 함께 하여 미얀마 선교에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된다.
카렌족 성경번역 사역을 마친 프란시스 메이슨 선교사(Francis Mason)가 카렌족 복음화가 안정권에 들자 카친족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1873년에 카친 지역에 방문하게 되지만 이미 나이가 많아 소천하게 되고 그의 뒤를 이어 로즈(Rose) 선교사가 1875년에 카친 지역에 와서 사역을 함으로 몇 명의 카친 신자들이 생기고 1878년에 최초의 카친 침례교회가 생기게 된다.


1890년에는 26세의 젊은 올라 한슨(Ola Hason) 선교사가 카친 지역에 와서 카친말을 배우며 연구해 1895년 카친 문자를 만들게 된다. 1910년에는 카친 사전을 완성하고 1926년에는 카친 성경을 완역하게 된다. 1932년에는 카친침례교 신학교가 세워지고 여러 학교들이 세워지면서 카친족들도 한 세대 안에 문맹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100% 가까이 복음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이후 연방정부 형태로 존재해 오던 소수종족 자치권은 1962년 버마 연맹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면서 중앙정부 중심의 버마어 교육과 행정이 강화되자 카친어를 비롯한 모든 소수종족언어로 진행되던 교육과 개발이 약화되거나 중단되게 된다.


카친주는 동서북쪽으로 태국, 라오스, 중국, 인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높은 산악지역으로 가로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버마족들이 자리 잡고 있어 지난 60여년동안 카친족들은 지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곳이었다. 이런 중앙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자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소수 종족들은 자치군을 결성하고 중앙정부와 대치하게 된다. 카친족은 자신의 자치기구를 결성하고 카친족 자치군(KIA)도 만들어 중앙정부와 투쟁을 해오게 됐다.



그러던 중 상황이 호전되어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약 17년간 KIA는 미얀마 중앙정부와 평화협정을 맺고 자치권 보장과 카친족의 복지를 위해 여러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중국과 협정을 통해 중국에 유리한 조건의 댐 건설을 허락하고 중국 사업가들에게 임산자원과 지하자원 개발권 등을 허락해 여러 이권들을 챙겨가게 되자 다시 무기를 들게 됐다.


미얀마 정부군은 카친 자치군을 해체하기 위해 정부군을 보내어 카친 지역에서 수많은 마을들과 교회들을 불태우고 목회자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을 살상하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2011년부터 2017년 사이에 내전지역에서 무려 11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기독교대학 설립을 위해 미얀마에 방문하시게 된 홍정길 목사가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어 기독교대학 설립에 앞서 밀알재단을 통해 카친지역에 난민 보호시설을 돕게 된다. 그런데 이 지역이 침례교회가 가장 많은 것을 보시고 교단 총회장 유관재 목사에게 이 상황에 대해 나누고 침례교단에서도 카친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해줄 것을 요청하게 됐다. 이에 총회장 유관재 목사는 총회 임원들과 함께 지난 3월 20~24일 미얀마를 방문하게 됐다.


20일 밤늦게 도착한 총회 임원 일행은 21일 오전부터 일정을 시작해 1983년 10월 9일 17명의 한국 정부 고관들이 순직한 아웅산 기념묘역을 돌아보고 불교도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슈웨다공 파고다에 들렀다. 오후에는 미얀마침례교총회 본부에 들러서 미얀마 침례교 역사와 현 상황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미얀마침례교총회는 현재 18개 종족별 지방회가 있고 4,522개의 교회와 7.028명의 목회자에 1,142,655명의 침례받은 성도들이 있다. 저녁에는 침례교 선교사들과 모임을 갖고 사역 진행상황과 열매 고충들을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22일에는 카친주의 행정도시인 미찌나에 도착해 마침 진행되고 있던 카친 침례교 남전도회 집회에 참석했다. 약 6,000여명이 참석한 집회였다.
총회장 유관재 목사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카친교회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했다. 집회 후에는 난민보호시설을 돌아보고 카친침례교총회 사무실에서 그동안의 내전과 난민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듣고 상호 협력방안에 대해서 논의했다.


23일에는 카친 지역의 이슈가 되고 있는 댐 건설 계획이 있는 곳을 돌아보고 중앙정부와 외국 기업들의 이권 침탈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카친족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24일에는 양곤에 다시 내려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다시 만나 카친주 방문 일정의 여러 면에 대해서 나누고 앞으로 사역방향에 대해서 논의했다.
카친족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지난 60여년동안 여러 고난을 당하면서 고립된 가운데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왔다. 카친 형제자매들이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미얀마 국내와 해외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한국침례교회가 함께 기도해주고 필요한 부분에 동역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김한식 목사 총회 해외선교부장, 용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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