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개역개정)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2:18, 새번역) 9절과 16, 17절에 3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축인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잠시 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니 잠시만 미뤄두도록 하죠.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가 혼자 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만든 세계에 ‘좋지 않다’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이제껏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모두 좋기만 했습니다. 그만큼 완벽하게 설계하고 빈틈없이 완성하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2장 7절에서 창조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표현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짝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굳이 독신자에 대한 반대 견해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이유도 없죠. 앞서 확인했듯이 창조가 완벽한 계획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뤄졌다면 혼자 사는 생활도 섭리 일부로 보는 것이 옳거든요. 좋지 않다는 표현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자기 부인(self-denial)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자기를 부인하면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독교가 점점 더 성장하고 현대로 오면서 이런 경향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인 유진 드류만은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인 개념인 자기 부인을 “마조히즘적 자기 부인”으로 보고 이런 기독교를 자기 혐오, 자기학대, 심지어 가정학대를 정당화할 여지를 남겼다고 비판합니다. 한편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핵심가치는 유지하면서도 이것이 마치 자아실현에 도움을 준다는 새로운 변화도 있었습니다. 김규보는 “거짓 자기, 참 자기, 자기 부인: 대상관계 이론을 통한 기독교 자기부인 고찰”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기독교 영성의 자기 부인의 이상이 자기애로, 자기애가 자기 문화로, 자기 문화가 자기 극복으로, 마침내 자아실현으로 옮겨갔다고 비판했던 부룩스 홀리필드(E. Brooks Holifield)의 말을 인용합니다. 필자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의 자기 부인이 결국 자아실현에 봉사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교회가 더 이상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가치를 강조하려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미처 다 이해되기도 전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다. AI의 혁명, 첨단과학의 시대, 자동화 시대 등 이 시대를 칭하는 많은 용어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때로는 혼란스럽게도 한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이제 기계가 사람을 통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대두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것은 편리함과 예측 불가능한 변화라는 양날의 칼을 마주하며 사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시간 지속된 팬데믹은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서로 마주 보고 눈을 맞추며 소통하는 일상을 마비시켰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매우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편리함이 주는 부작용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편리함의 중독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에 속절없이 밀려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혼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현실과 유사한 비현실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이제는 낯선 일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으로 가장 빛나야 하는 젊음이 기계의 통제와 가상 공간이라는 인위적 환경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가고 있다. 어쩌면 일부 특정한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불안감과 외로
2장 7절에 나오는 사람 창조 이야기는 1장 27절보다 훨씬 자세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따로 설명하고(여자의 창조는 20절 이후에 나옵니다) 흙을 이용해 신체를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죠. 반면 세분 하나님이 상의하시는 장면은 여기에서 볼 수 없네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상식일지 모르나 비신자라면 굉장히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흙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너무 동화 같으니까요. 창세기는 왜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걸까요? 단순하게 사람이 본래 흙이었다는 정보만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흙은 땅이고, 땅은 곧 세상이죠. 따라서 이 구절은 먼저 창조된 세상의 바탕 위에 사람이 창조됐음을 지적하면서 사람이 하나님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형상을 가졌다고 해도 그분의 섭리에서 멀어진다면 무가치한 흙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선언이기도 하죠. 이어질 에덴 사건에 대한 창세기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의도에서 벗어날 때 벌어지는 결과와 이를 가엾게 여긴 창조자의 은총을 이해하기
[목사의 서재] 저자 등판 미래세대 프로파일링 - 김현철 목사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읽고 나면 모든 창조가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바로 이어지는 2장 4절에서 다시 한 번 창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앞선 창조이야기와 어딘가 다르다는 점이죠. 2장 4절은 사실 두 문장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개역개정은 한 문장으로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두 문장으로 번역해서 보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앞 문장은 앞선 2장 3절까지의 창조이야기의 끝마무리로 볼 수 있습니다. 문장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듯이 1장 1절로부터 시작된 창조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앞선 창조 이야기를 잊기나 한 듯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2장 말미까지 계속되죠. 결과적으로 1장과 2장에 창조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 셈인데, 특히나 앞선 이야기에서는 사람 창조 이전에 식물이 만들어진 반면, 두 번째 창조에서는 사람 창조 이후에 식물이 나타난 것으로 나오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더욱 헷갈립니다. 새번역처럼 2장 4절이 두 문장으로 분리되면 그나마 다른 이야기로 느껴지지만 개역개정처럼 한 문장으로 써 놓으면 앞뒤 구분이 되지 않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대부분 부자 청년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와 같은 청년이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결국, 청년은 근심하다가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증언입니다. 한번 가정해 볼까요? 만약 이 청년이 재물을 다 팔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혹은 이 청년에 대한 세상의 판단은 어땠을까요? 먼저 세상의 판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날 정말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전 재산을 다 바친 청년이 있다면, 세상은 이 청년을 존경할까요? 존경은커녕, 아마 미쳤다고 하진 않을까요? 그를 괴짜라며 비웃거나 어리석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가정해, 그 부모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대성통곡을 할지도 모를 일이고 당장에 그를 잡아와 정신병원 의사의 감정을 받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도와 성공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원익이 쓴 ‘신화, 인간을 말하다’는 이 말을 조금 더 심층 깊은 의미에서 다룹니다. 고대 신화나 스토리에서 보면, 주인공인 영웅에게는 언제나 그를 이끌었던 정신적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아세아연합신학교 신성욱 교수는 오늘날 설교자의 설교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처럼 설교자들이 설교했다는 것이지요. 이것만큼이나 비성경적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자주 인용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을 통해 신 교수는 이 문장을 바꿉니다. 오히려 성경적인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능력이 없는 자를 도우신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와 같은 설명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돕는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위해 요한복음 1
‘당신은 어느 세대입니까?’ 책 속에 이런 질문이 있다. 이 글, 아니 신문을 읽고 계시는 당신도 답해 보시면 내가 어느 세대인지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사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1번, 다 사랑스러워 / 2번, 핫이슈 / 3번, 오로나민C / 4번, 이근 대위 / 혹 이 중에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면 당신은 X세대 이전의 베이비부머 세대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Z세대 이후인 알파 세대와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할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묘약이 여기에 있다. “미래세대 프로파일링” 의 저자는 청소년들의 냉철한 프로파일러가 돼 다음세대의 행동패턴과 심리학 측면, 실제적 통계를 분석해 우리가 앞으로 만날 미래세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프로파일러”라는 명칭이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이라서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미래세대를 분석하고 그들의 행동방식과 성격을 분석하는 것은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할 만큼 고도의 전문성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메타버스 교회와 다음세대 현장 전문가인 저자의 이야기는 미래세대와의 진정한 소통의 가이드를 보여준다. “부모님과 말이 안 통해요!” “우리 아
용감한 전사가 대담하게 앞으로 나가면서 적의 모든 화살을 가로막을 때, 또한 뒤따라오는 그의 병사들을 보호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스러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남편에게 그토록 닮고 싶었던 인생의 아름다운 본보기를 찾았을 때, 그리하여 그를 의지하면서 그의 옆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이 아내가 남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담한 스승이 조롱으로 에워싸이고 질투로 핍박받으면서 조용하게 그의 자리에 서 있을 때, 모든 공격이 오직 스승에게만 향하고 있고 그를 지지하는 제자에게 향하고 있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이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암탉이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암탉의 날개를 펴 뒤에 따라오는 병아리들을 덮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병아리들이 암탉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관계는 바뀌어야 합니다. 용감한 전사는 그의 병사가 진실로 그를 따르는지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모든 화살이 병사의 가슴을 겨냥할 때, 실제로 나타난 위험에서 그가 그를 따르는지, 혹은 병사가 용감한 자를 잃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