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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창 2:7~17)

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⑦

2장 7절에 나오는 사람 창조 이야기는 1장 27절보다 훨씬 자세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따로 설명하고(여자의 창조는 20절 이후에 나옵니다) 흙을 이용해 신체를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죠.

 

반면 세분 하나님이 상의하시는 장면은 여기에서 볼 수 없네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상식일지 모르나 비신자라면 굉장히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흙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너무 동화 같으니까요. 창세기는 왜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걸까요?

 

단순하게 사람이 본래 흙이었다는 정보만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흙은 땅이고, 땅은 곧 세상이죠. 따라서 이 구절은 먼저 창조된 세상의 바탕 위에 사람이 창조됐음을 지적하면서 사람이 하나님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형상을 가졌다고 해도 그분의 섭리에서 멀어진다면 무가치한 흙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선언이기도 하죠. 이어질 에덴 사건에 대한 창세기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의도에서 벗어날 때 벌어지는 결과와 이를 가엾게 여긴 창조자의 은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를 오해하면 ‘정말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빠져들게 되는데, 흙이 사람이 됐다는 주장을 하려면 앞뒤 문맥 속에서 창조 재료에 대한 언급이 더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창세기 안에서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흙이라는 재료를 부각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쓰인 문장이니 당연하죠. 성경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이어지는 2장 8절부터 15절까지에는 에덴동산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가 나옵니다. 왜 만들었는지, 무엇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들이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면 네 강과 강이 흐르는 지역 이름이 눈에 띄는데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아담이 에덴동산에 살던 시절에는 굳이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 살면서 강 이름을 하나하나 지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훗날 사람이 번성한 뒤에야 붙었을 강 이름이 창세기에 기록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글이 쓰일 당시 독자들이 알고 있는 이름과 지명을 언급함으로써 에덴동산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었음을,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죠.

 

창세기 속 이야기들이 은유와 상징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실제로 일어난 일이 그 바탕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신화가 아닌 실제 삶의 기록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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