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에덴(창2:4)

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⑥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읽고 나면 모든 창조가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바로 이어지는 2장 4절에서 다시 한 번 창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앞선 창조이야기와 어딘가 다르다는 점이죠. 


2장 4절은 사실 두 문장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개역개정은 한 문장으로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두 문장으로 번역해서 보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앞 문장은 앞선 2장 3절까지의 창조이야기의 끝마무리로 볼 수 있습니다. 문장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듯이 1장 1절로부터 시작된 창조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앞선 창조 이야기를 잊기나 한 듯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2장 말미까지 계속되죠. 결과적으로 1장과 2장에 창조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 셈인데, 특히나 앞선 이야기에서는 사람 창조 이전에 식물이 만들어진 반면, 두 번째 창조에서는 사람 창조 이후에 식물이 나타난 것으로 나오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더욱 헷갈립니다. 새번역처럼 2장 4절이 두 문장으로 분리되면 그나마 다른 이야기로 느껴지지만 개역개정처럼 한 문장으로 써 놓으면 앞뒤 구분이 되지 않아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 됩니다. 장과 절의 구분은 16세기 이후에 붙여진 것인데 가끔 우리는 성경의 저자가 처음부터 장 절까지 의도하고 책을 쓴 것으로 착각하기 쉽기에 이런 혼란이 발생하곤 하죠. 


우선 1장 1절부터 2장 4절 전반부까지의 글과 2장 4절 후반부 이후의 글이 서로 다른 글이라는 점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유심히 읽어본다면 두 이야기 모두 창조를 설명하지만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순서에 맞춰 하루씩 창조가 이뤄지는 가운데 사람의 창조도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된 것들 가운데 하나로 다뤄지죠. 따라서 아담과 하와라는 구체적인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가 창조됐다는 상세한 설명도 없으며 이들이 사는 장소인 에덴동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사람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로서 존재하죠. 


반면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에덴에서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창조됐는지,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달랐는지, 에덴은 어디에 있으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부터 풀어낸 겁니다. 따라서 1장의 창조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과정에서 내용이 전혀 섞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배치됐다는 점입니다. 혼란을 피하려면 두 글의 내용을 발췌해 하나의 글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각각의 글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모두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두 개의 글이 오랫동안 따로 존재해왔고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받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두 번째 창조에서 식물들이 사람보다 늦게 등장하는 것도 쉽게 설명이 됩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창조의 구체적 순서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에덴 안에서 겪는 사건에 더 관심이 있죠. 따라서 식물에 대한 언급도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취지로 나오게 됩니다. 창조된 순서보다는 중요성에 맞춰 쓰다 보니 사람 창조 이후에 등장하게 됐습니다.



총회

더보기
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